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0년 봄, 마음샘터 모임을 마치고

오늘 나는

by 우람별(논강) 2010. 5. 3. 06:04

본문

토요일 아침, 출근을 서둘러야 할 시간인데.

오늘은 좀 특별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가까운 친척 할머니의 죽음 소식을 엊저녁 들었기 때문이다.

안양 장례식장이라면서 부음을 전하는 

집안 아저씨의 전화를 받은 이후, 마음이 짠했다.

2년 전 할머니를 찾아뵈었을 때의 그 순박한 웃음이 눈에 선한데

그간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떻게 사셨는지가 몹시 궁금하다.

착하디착한 명자 아지메의 절규 장면도 연상되면서

마음은 벌써 장례식장에 가 있었다.

마침 토요일은 수업도 없고 해서 학년부장한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고, 부담임인 유선생한테도 반관리를 부탁해 놓았다.

 

부모님께서는 부산의 외삼촌 차를 타고

고향 마을로 나물을 뜯으러 가시기로 했던 날인데,

갑작스레 부음을 접하고 나서는 난감했으리라.

안양까지 가는 교통편도 문제고......

대구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제가 두 분을 모시고 안양 장례식장에 들렀다가

모시고 여주 이모네 집이나 충주로 갈테니 그렇게 아세요."

"그래 주겠니? 그럼 우리가 고맙지, 잘 됐다."

 

부모님 모시고 안양장례식장을 향해 출발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시고 계신데

완고한 노인의 이미지 그대로다.

특히 구레나룻의 끝부분만을 기른 것은 보기에 좀그래서

수염을 깎으시라고 해 보지만 끝까지 기르시겠다면서

누구의 어떤 말도 완고하게 무시해 버리신다.

게다가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한마디는 가슴을 후벼 판다.

그래서 그런지 늘 가까이 계신 어머니의 말씀도

언제부턴가 덩달아 날이 서 있는 느낌이다.

어머니도 섭섭한 아버지 말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참지 않으신다.

한 맺힌 과거 이야기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된다.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같은 어머니의 말씀,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는 태도라서 중간에 끊을 수도 없다.

매우 권위적인 아버지 또한 그 얘기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툭하면 소리를 버럭 질러 '또 시작한다'며 말문을 막으려 한다.

듣고 있는 자식은 이럴 때 참 난감하기 그지없다.

 

3시간 남짓 걸려서 안양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제단의 영정에 분향을 하고 예를 갖추었다.

상주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도 드렸다.

당숙과 당고모부 내외분도 와 계셨고,

상복을 입은 명자, 명희, 명옥 아지메의 슬픈 모습도 보였다.

할머니의 그간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입관 시간이 다 되었는지 상주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입관실에 들어가 보니 망자께서는 수의를 곱게 차려입고 누워계셨다.

상주인 은수아재는 고인의 깨끗한 얼굴과 하얀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픈 마음을 엉뚱한 말로 둘러대지만 이내 눈물을 흘리고,

명자 아지메는 흐느낌이 간절해서 많은 이를 울게 만든다.

엊저녁까지 재미난 얘기를 하면서 주변을 웃기시던 분이었다는데,

노인요양원에 1년간 사시면서 '요양원 기쁨조'였다는데

그렇게 노인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하신 분이었다는데,

이렇게 84세를 일기로 홀연히 떠나니 노인들은 얼마나 섭섭하실까.

영면하시는 순간까지도 환하게 웃으셨다고 한다.

아직도 입가엔 미소가 맴돌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입관을 하고 난 뒤,

아버지께서는 고인을 위해서 명정(銘旌)을 쓰셨다.

빨간 천에 쓰는 회색 글씨는 아버지의 손끝에서 흘러나왔고,

글씨를 쓰기 전에 소주 두세 잔을 연거푸 드시더니

쓰고 나서도 몇 잔을 더 드신다. 써 놓으신 글씨에 만족하셨음인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그런지 더 흥분을 하고 마신다.

"이 글씨는 보통 글씨가 아니라 명필의 글씨여, 알어?"

술이 벌써 취하셨다는 느낌이 드니 불안해진다.

 

망자께서는

우리 어머니가 결혼을 하고 시집살이를 시작할 때와 똑같은 시기에

개울 건너 사시던 육촌할아버지한테 재취로 와서 이웃에서 살게 되었고,

딸 셋을 내리 낳았는데, 연속으로 두 아들을 낳은 우리 어머니를 무척 부러워했단다.

직접 낳은 맏딸은 나보다 한 달 정도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아줌마이다.

10살 무렵 고향을 떠날 때까지 소꿉친구로 가깝게 지냈다.

워낙 착해서 나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었고,

명희나 명옥 아지메를 업고 노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특히 명옥 아지메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놀다가 엎어져서

크게 다친 일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막내인 명옥이 아지메는 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아 있다.

"조카님은 몇 년 전에 많이 모였을 때 나를 부르지도 않고 해서 섭섭했어요." 하길래,

"그땐 아지메가 횟집이 하도 잘 돼서 너무 바쁘다고 해서

일부러 연락을 안 한 것이니 섭섭해 말아요. 모처럼 서울에 올라갔다가 

친척들 만나 어울리는 시간을 갖게 돼서 얼마나 좋던지요.

기회 있으면 또 그런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고 했다.

바삐 사느라 친인척간의 만남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요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냐며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당숙은 문상을 오긴 했지만 힘들어 하신다.

언제부턴가 혈액암을 앓고 계시니 더욱 그렇다.

교회 장로님으로서 안양보육원에서 정말 열심히 사셨던 분인데

그 암이란 놈이 몸속에 들어와 얼마나 괴롭혔는지

건장한 몸이 많이 수척해지셨고, 머리숱이 하나도 없다 

우리와는 제일 가까운 친척일 테지만

멀리 살고 있어서 자주 찾아뵙지를 못한다.

(두 동생이 그래도 가까이 사니 자주 찾아뵈었으면 싶다.)

나는 그저 완쾌되기만을 기대하고 기도할 뿐이다.

 

당고모의 둘째딸, 얼굴이 희디흰 연희도 왔다.

충주에 사는 친척 봉주도 왔다.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다가

부음을 듣고 찾아왔단다. 농사꾼의 이미지 그대로다.

고향에 들르면 가끔씩 볼 수 있었던 봉주, 내 두 살 아래 친척 동생,

아버지(77세), 어머니(78세)를 극진히 모시고 사는 효자 봉주,

고향에서 논농사만 짓고, 틈틈히 건축일을 해서 먹고 사는 친구,

내가 농담삼아 퇴임 후에 고향에 살고 싶은데, 

밭뙈기 한 100평 정도 줄 수 있냐 했을 때

서슴지 않고 그러마 하는 참으로 좋은 친구,

순박한 고향의 아저씨를 그대로 닮아서 마냥 좋다.

친척들과 아쉬운 인사를 하고 장례식장을 빠져 나와

연희를 집 가까이 태워다 주고, 여주 방향으로 향했다.

봉주는 충주의료원에 입원 중인 아버지 병(신장 결석)간호를 잠시 미루고

불원천리 문상을 왔었고, 이제 돌아가는 길이니

방향이 같고 해서 이천까지라도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는 조카 봉주한테 고향 소식을 듣고 싶으셨던지

뒤에 앉은 봉주를 뒤돌아보면서 많은 궁금증을 표현하셨다.

봉주는 역시 고향에 오랫동안 살고 있으면서 별의 별 소식을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군가에 대해 얘기하면서 특유의 독설과 욕설을 내뱉는다.

'이왕이면 좋게 얘기해도 될 텐데, 왜 늘 독설만 늘어놓으실까?'

민망해진 어머니는 또 개입해서 핀잔을 주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잠자코 들도 있던 봉주 동생은 너털웃음만 지을 뿐이다.

고향지기 봉주가 오늘따라 참으로 위대해 보인다.

 

이천에서 봉주와 이별하고, 여주군 가남면 대신리 26번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찾아가니 금방 이모부집에 닿을 수 있었다.

이종동생 장원과 승원이, 현정이, 그녀의 신랑 정서방이 반가이 다가와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고, 나도 이모부, 이모님께 절을 올리고 그간의 안부를 여쭈었다.

작년 여름 벌초할 무렵, 처음 찾았던 이모부집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2층 슬라브 위엔 방 2칸들이 조립식 주택 한 동이 셋방으로 세워져 있는데,

아직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곧 누군가 들어와 살면 좋을텐데.....

마당 한쪽 구석 닭장엔 병아리보다 조금 더 자란 놈들이 떼지어 있다.

스무 마리 남짓 될까? 낯선 이가 먹이라도 줄까 싶어 철망 앞으로 모여든다.

마당 한 켠에는 이모가 심어놓은 듯한 뭔가가 자라고 있는데 풍성하다.

이모님 말씀에 의하자면 요즘 이웃들과 품앗이 하면서 

조금씩 일하는 재미가 쏠쏠하신 것 같다.

 

최근 큰이모는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다는데 의외로 담담하시다.

어머니와 막내이모는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어둡다.

조직검사를 다시 받아야 확실히 아는 것이겠지만.....

장원이가 서울의 큰병원에 조직검사를 의뢰해 놓았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다면 갈 것이고 병을 낫게 해주면 조금 더 살 것이고,

지금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난 조금도 두렵지 않아."

하시는 큰이모님의 내공있는 말씀이 오히려 위안이 된다.

 

외삼촌 내외분이 저녁 식사를 시작할 무렵 들어오셨다.

충주 고향 마을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늦게 도착한 것이다.

아버지는 술이 취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한마디한마디가

힘이 들어가고 언성이 높아지면서 급기야는 실수투성이다.

그럴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어머니와 나일테지만

삼촌이아 이모들도 이젠 익숙하신가 보다.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고 밤 9시 경, 이모네집을 나왔다.

문경에서 또 다른 일행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남전 형 일행이 예정대로 전국에서 모여 있었고,

주요 일정을 내가 주도하기로 되었던 터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것이 사실이다.

'아버지께서 더 이상 말 실수를 안하셨으면 좋겠는데.....'

 

마음샘터 회원님들은 새재식당 옆 '팡팡노래방'에 있었다.

내가 밤 10시경,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모두 8명이 되었다.

남전, 우산, 서백, 청로, 매현, 하늘난초, 단유, 나

이렇게 조촐한 규모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청로와 남전 형은 낮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문경새재 찻사발축제장을 돌았고,

서백, 매현, 하늘난초는 서울에서 합류, 저녁무렵 같은 차로 내려왔다.

단유는 먼길도 마다 않고 춘천에서 문경까지 물어물어 찾았고,

우산형도 근무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무쏘의 뿔처럼 달려왔다.

작년 이맘 때도 문경 찻사발 축제 때 모였는데,

똑같은 시기에 또 문경에서 모인 것이다.

업저버로 주흘요의 월파 이정환 선생도 참여하셨다.

같은 일가라서 언제부턴가 나와도 형님동생하고 있다.

"아우님 오셨구먼 늦게 왔으니 벌주로 석잔을 마셔야

우리와 대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하면서 술잔을 따라주는데,

그 멋있는 턱수염과 하얀 저고리가 퍽이나 잘 어울린다.

노래방의 현란한 조명 속에서도 그의 겉모습은 수려하다.

57세의 나이에 걸맞게 수염은 갈수록 더 희어졌지만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춤솜씨도 좋았다.

 

밤 늦게 숙소를 구하려니 주변에는 없단다.

팔왕휴게소 여궁산장에서 묵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주인장인 나곡 선생과 미리 연락이 닿지 않아서 아쉬웠다.

결국 일행은 점촌역 주변에 있는 숙소를 한참만에 구해서 

대리운전 기사의 도움을 받아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허름한 숙소에 여장을 풀고, 술과 음료수를 마시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시작되었다.

단유님께서는 향이 좋고 싱싱한 곰취나물과 몸에 좋은 두룹과 산더덕을

잘 다듬어서 제법 많은 양을 준비해 와서 감동을 주었다. 초고추장까지.^^

청로는 먹음직스런 안강산 토마토를 내 놓았고,

내게도 개인적으로 시집 한 권을 꺼내더니 생일선물이라며 주었다.

지금까지 읽어 본 시집 중에 제일 맘에 들고 좋았단다.

박철 시인의 '불을 지펴야겠다'란 제목의 시집인데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청로, 정말 고마워!!!!

최근 부쩍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서백도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꺼내 시 한 편을 서둘러 찾더니

청로에게 건네며 읽어 달라며 요구한다.

차례대로 청로와 단유가 박노해의 시 두 편을 낭송하고,

나도 청로의 마음이 고마워 박철 시인의 시 한 편을 골라 읽었다.

청로는 특히 '걸레'라는 시가 좋다고 하길래 그 작품도 읽었다.

우산형은 너무 분위기가 무겁다며 적절한 시점에 화제를 바꾸었고,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천안함에 얽힌 여러 문제를 안주거리 삼아 이야기하다가

어느새 학교운영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늘난초님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전교조 문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

20년 넘게 끊임없이 전교조에 관계해 온 한 사람으로서

그 참교육 운동의 순수성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차츰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학부형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섭섭함마저 느껴진다. 도대체 그 원인이 뭘까?

많은 동료들이 변함없이 그 순수와 정의를 지키며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왜 이 정도까지 되었을까?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에서 연일 마녀사냥식 비판을 가하기 때문일까?

그 안타까움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

전교조가 없었다면?

'전교조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책을 썼다는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의 의식 속에는 전교조야말로

이 나라의 교육을 망치고 있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근데 과연 그럴까?

전교조를 결성하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것은 무엇일까?

앞뒤 가리지 않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순수함과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고,

많은 교사 대중이 동참하고 조합원으로 활동하는 것 아닌가?

 

부도덕한 정권은 전교조를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근의 마녀사냥식 탄압을 자행할 수 있을까?

그간 전교조는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교육적 원칙을 고수해 왔고,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그 교육적 순수가 없었다면, 벌써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언론을 통해 '마녀사냥'식으로 전교조를 탄압한다 해도

그 참교육의 깃발은 결코 내릴 수 없고 더욱 휘날리게 할 것이다.

탄압을 받을수록 전교조는 더욱 공고해질 것을 의심치 않는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러구러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다.

잠자리를 만들고 피곤한 몸을 눕힐 때는 거의 새벽 5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코를 심하게 고는 나는 다른 분들을 먼저 재워야 했다.

두어 시간 정도 잤을까? 피곤하지만 일찍 깨어 일어나 앉았다.

조금 후 우산형이 일어나고, 남전형도 일어나 독특한 운동을 하고

서백도 푸짐한 몸매를 자랑하며 일어나 앉아 히죽 웃는다.

청로가 피곤했던지 코를 골며 마지막까지 잤다.

 

아침 식사는 문경새재 제1관문 앞,

모범음식점, 청포묵조밥 식당에서 했다.

묵과 밥의 조화가 어울리는 한 끼 식사였다.

원래 계획은 레일바이크를 타 보고,

고모산성 일대의 옛길을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는 것인데

문경새재 1관문까지 왔으니 찻사발축제 현장을 잠시 보고,

추억이 서린 팔왕휴게소까지 갔다 오는 것으로 바꿨다.

계곡을 따라 흙길을 밟으면서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왕복하는

30리 남짓 되는 정도의 트레킹 코스는 우리나라 최고의 길!

어떤 계절에 걸어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그 길,

마음샘터님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걷는 그 길,

서백과 짝을 지어 걷다가 또 우산형과 함께 걷다가

어느새 매현과 짝을 이뤄 아이들 얘기,

부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한다.

 

팔왕 휴게소 주변엔 오늘도 색소폰 소리가

계곡 물 위로, 나무 사이로 잔잔히 울리고 있다.

주인장이신 나곡 선생이 직접 불거나

또 다른 연주자의 솜씨일테지만 격에 어울려서 좋다.

색소폰 소리에 현혹되었는지 찾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앞치마를 두룬 아주머니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주인장은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주문 받느라 바쁜 듯한데, 

찾아온 우리를 알아보고는 아주 반갑게 맞아준다.

나곡 선생은 말총머리를 했는데 꽤 건장한 분이고, 나이는 60세 정도?

4년 전 추운 겨울인가, 역시 남전형, 월파, 우산, 토담, 유천 등과 함께

팔왕을 찾았을 때도 색소폰을 불며 우리를 맞았더랬고,

여궁산장에 밤늦게 숙소를 마련해 주던 친절한 분이다.

 

나무 그늘 아래 원두막을 차지하고 앉아 땀을 식힌다.

작년 이맘 때의 모임 장면이 떠오른다. 연주는 계속되고....

앞치마를 두른 채 연주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서백은 색소폰을 배워볼 요량으로 악기를 당장 사고 말았다고 한다.

장사하는 아지메의 연주솜씨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가 보다.

하늘 난초는 연주에 맞춰 노래를 나즈막히 부르는데 훌륭하다.

목소리의 떨림도 좋고, 멋을 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CEO라 하는데, 여유가 있어보여 좋다.

 

자, 이제 한낮의 시간 점심식사를 해야 할 시간,

팔왕휴게소를 나와 찻사발 축제가 열리고 있는

왕건세트장에 잠시 들러 도자기 그릇과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불현듯 명혜당이 생각나 전화를 거니 기침섞인 목소리가 애처롭다.

매현과도 잠시 통화를 했는데, 감기가 심하다며 걱정을 한다.

'병원에 다니니 곧 나아지겠지. 식사나 제대로 하는가 모르겠다.'

기와집 용마루 위로 흐르는 하늘의 청초함을 가슴에 담고는

일행과 함께 진남교 부근, 고모산성이 올려다보이는

영남매운탕집으로 들어가서 얼큰한 잡어 매운탕으로

점심 식사를 마치니 어느새 우리 샘터님들과 헤어질 시간이다.

 

서백은 차의 주인이지만 한잔 했으니

하늘난초가 운전을 해서 귀가 길을 서둘렀고,

우산형님은 남전형과 청로를 태우고 포항으로 가시고,

단유님도 가고, 나도 가고 모두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문경에서의 1박 2일을 추억으로 남겨두었다.

마음샘터를 사랑하는 님들이여,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이 만나서 어울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날을 기다리면서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렵니다.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나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버이날 풍경 몇 개  (0) 2010.05.08
오늘은 생태체험하는 날  (0) 2010.05.06
우리 친구, 유선철 선생님  (0) 2010.04.30
새학기를 준비하면서  (0) 2010.03.01
소훈이를 보내고 성주의 성밖숲으로  (0) 2010.02.28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