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날, 윈드폴 게스트하우스 주인 내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곧장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아침 식사는 버스 출발이 너무 빠른 시간이라 게스트하우스에서 하지 못하고 그냥 적당할 때 사먹기로 했다.

포카라 출발 직전의 게스트하우스 숙소 주변의 사진이다. 오른쪽 산 아래쪽으로 페와 호수가 있는데 그곳을 날 밝을 때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게 못내 아쉽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콜택시를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왔다. 먼저 버스의 뒷부분에 각자 가져온 캐리어를 실어놓으니 손이 홀가분하다. 어딜 가나 무거운 짐은 늘 부담스러운 법이다. 출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가까운 어딘가에서 아침을 해결하면 된다.


빵과 밀크티로 요기를 하면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큰맛은 없어도 먹을 만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멀고도 지루한 길이지만 네팔이란 나라의 속살을 느낄 수 있는 풍경들이 많아서 좋다. 빠른 비행기보다 느린 버스 타기를 잘한 것 같다는 결론! 천천히 다녀야 볼 수 있는 게 많으니 이런 가성비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이제 흰수염을 깎을 때가 되었지? 나는 귀국해서도 며칠간 그냥 두려는데, 휘동이 그대는?








잠시 쉬어가는 어느 뷔페 식당, 먼지투성이 길가에 마련한 야외 식당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모두 실내로 들어가기 바쁘다.










버스의 내부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자리마다 생수병을 하나씩 제공하는 운전기사의 친절함이 맘에 쏙 들었다.



포카라-카트만두 구간 도로포장공사에서 한 노동자가 삽끝으로 길바닥을 지속적으로 긁어대고 있다. 노동생산성이 매우 낮아 보이는 장면 같아서 사진에 담았다.


네팔 여인들의 복장을 유심히 보면 즐겨입는 옷색깔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버스 안에서 휘동과 태국은 나란히 앉아서 모바일 인터넷을 검색, 한국인이 경영하는 네팔짱 카톡 연락처를 알아내고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카트만두의 숙소를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포카라에서 08:00 출발, 카트만두 16:40 도착, 계약해 놓은 숙소에서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차량을 보내줘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숙소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카트만두까지 소요된 시간은 약 8시간 40분 정도다.

나와 정우가 이틀 동안 묵을 방이다.

태국과 춘수의 방

창열과 휘동의 방이다. 세 방 모두 보다시피 깔끔하다.

숙소는 이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다. '네팔짱'이라는 이름을 내건 숙소인데 각각 경기도 여주와 안성이 고향인 여성 두 분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분은 예순 살 정도의 백발여인이고 또 한 분은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백발여인을 언니라고 불렀다. 40대 여인은 거침없이 내뱉는 말씨와 우리를 모두 형님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독특한 친근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하튼 만리타국에서 구수한 말씨가 매력적인 두 분의 한국인을 만나 기뻤고, 그들이 제시하는 숙소와 음식들이 우리의 요구 수준에 부족한 게 없어서 대만족이었다.


네팔짱 마스코트 격인 주인장의 옷차림과 모습이 참 소박해서 좋다. 짧은 머리, 화장기 없는 만면의 미소, 말할 때의 제스처 등이 인상적인데 처음 볼 때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포항의 소설가와 외모가 너무나 닮아있어서이다. 혹시 그 작가의 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세상에는 어찌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았는데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입에 맞는 저녁 식사에 모두들 매우 흡족해 했다. 소주와 맥주, 보드카 '8848'을 곁들이면서 그 흥겨움을 발산하기 바빴다. 이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은 카트만두 계곡에 집중되어 있는 네팔의 문화재를 감상하면서 한 바퀴 여유있게 돌아볼 예정이다. 하룻밤을 더 묵고 나서는 숙소에서 가까운 광장을 찾아 투어를 한번 더 한 뒤, 오후 늦게 공항으로 가서 귀국편 비행기를 탈 것이다.

"형님들, 여기 보세요. 다들 멋지십니다. 하나, 둘, 셋,(찰칵)" "형님들, 음식들 맛이 괜찮을 겁니다. 많이 드십시오." 안성의 여성이 우리를 통칭해서 부르는 '형님'이란 호칭이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음식은 과연 대만족이었다.

화장실이 있는 곳을 안내하는 표지판 위의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한번 읽어 보시라.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명문장이다. 어찌 이렇게 '보고 싶은' 마음을 풍경소리에 빙의해서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 친구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해 보시게. 풍경소리 한번 들어 보지구.^^

저 네팔짱의 주방 안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인들은 한국음식을 요리하는 분들로 이 식당에 소속되어 있는 직원들이다. 일정액의 월급을 받고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을 위한 한국의 음식을 전문가들처럼 아주 잘 만든다고 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그들의 음식은 따로 있어서 한국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새벽 3시쯤, 침대가 흔들린다는 느낌이 들어 잠이 깨었다. 동네의 개들이 무슨 불길함을 느꼈는지 일제히 짖어댔다. 지진이 일어났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정전이기도 했다. 황당하긴 했으나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하고 계속 잠을 청했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카투만두 53킬로미터 지점에서 5.5진도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춘수와 태국이는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음에 비해 창열과 휘동은 지진 발생 사실조차 모르고 잤다고 한다. 잠시 동안의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10여 년 전, 네팔 전역을 흔들었던 대지진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는 물론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던 사건을 생각하면 아찔한 느낌도 없지 않다.
다음 날 아침 06:30분, 친구들은 숙소 가까이 있는 불교사원인 스와암부나트(일명 원숭이 사원)를 찾아가 둘러보자고 하는데, 나는 몸살 기운이 심해져서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다. 휘동이가 준 종합감기약을 먹고 잠을 잤지만 아직 성치 않아서 차라리 쉬는 게 좋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친구들은 두어 시간 정도의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 태국이의 전언에 의하면 그 사원은 불교사원임에도 힌두교 양식과 결합된 건축물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197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카트만두 시내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라 했다. 그러나 심한 매연으로 뚜렷하게 볼 수 없어 아쉬웠단다.

네팔짱의 마스코트 언니께서는 우리 숙소 옆에 위치한 '반야원'이라는 집에서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독실한 불자가 돼서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하면서 거기에서 조용히 수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해서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기쁨을 찾는 분이 아닐까 싶다. 연세가 많으신 고향의 어머니를 뵙기 위해 1년에 한두 번쯤은 한국으로 가고 있고 한국 국적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얼핏 보면 젊은 할머니 모습의 이미지인데 결혼은 해 본 적이 없단다. 존경스럽다.


우리가 ‘반야원’으로 들어온 이유는? 네팔짱 숙소에서는 이른 아침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백발의 언니가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음식은 참 맛있고 정갈해서 모두들 만족해 했다. 특히 식사 후에 들어보라고 제공하는 요쿠르트의 달콤함은 압권이었다. 내일 아침 식사도 여기서 한다.


09:00시에 숙소를 떠나 박타푸르로 가는 길은 예상과 달리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창 안으로 스며드는 매캐한 냄새는 코를 찔렀다. 공기오염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이다. 몇년 전 인도의 델리공항에 내렸을 때 느꼈던 매캐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0:00시경, 박타푸르(Bhaktapur)에 도착했다. 입장료가 일인당 1800루피다. 네팔 주변의 나라(아프가니스탄, 뱅글라데시, 부탄, 인도, 몰디브, 파키스탄, 스리랑카, 중국) 사람들은 500루피인데 우리에겐 3배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권을 보자고 하니 중국인 행세도 할 수 없다. 입구에 들어서자마 싼값으로 가이드를 해 주겠다며 여러 명이 달려든다. 거절했다. 족장인 창렬이를 통해서 안내를 받으면 되는데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건물도 보인다.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는 박타푸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네팔의 보석같은 도시이고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족장은 장소를 옮겨가면서 관련 설명을 덧붙였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기에 여행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 내 입장에서는 부득이 인터넷 자료를 소개하여 카트만두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다소 중복되는 내용이 있더라도 잘 이해해 주길 기대한다.
박타푸르는 네팔의 중세 건축 문화가 잘 보존되어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카트만두 계곡’에 포함된 도시이다. 카트만두 계곡에는 3대 고도(카트만두, 바탄, 박타푸르) 안에 있는 3개의 역사적 왕궁, 2개의 힌두사원(파슈파티나트, 창구나라얀), 2개의 불교사원(스와얌부나트, 보드나트)이 있다.
세계적으로 독특한 기념물들이 집중되어 있는 기념물 구역은 카트만두 계곡의 종교·정치·문화 생활의 고도로 발달한 건축 표현을 나타낸다. 이곳은 네팔 산악 지역의 중심 주거지이며 히말라야 문화의 핵심 중 하나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은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발원지이다. 창구 나라얀 사원은 2층 지붕이 있는 인상적인 사원으로, 카트만두 계곡에서 가장 오래된 비슈누 사원이다.
수도인 카트만두는 네팔의 정치·상업·문화의 중심지이며 풍요로운 문화 예술과 전통을 자랑하는 이국적이고 매혹적인 전시장이다. 타원형 그릇 모양의 카트만두 계곡은 테라스 모양의 녹색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붉은색 타일 지붕의 가옥들이 점점이 모여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계곡은 예전에 호수로 덮여 있었는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지혜의 검을 들어 벽처럼 막고 있는 산을 갈라 길을 내고 물을 모두 빼내 최초의 정착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카트만두 시는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다인종의 용광로였는데, 이 도시의 풍부한 문화유산은 여기에 기인한다. 독특한 건축 유산·왕궁·사원·정원이 있는 카트만두는 네팔 국내외의 많은 작가·화가·시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 도시는 수백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불교·힌두교, 밀교인 탄트리즘(Tantrism)이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자랑한다.
이런 종교들의 영향은 도시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요 기념물들은 대부분 12세기~18세기에 고대 말라(Malla) 왕조의 왕들이 세운 도시의 사회적·종교적 중심 지역인 더르바르 광장에 있다. 그중 흥미로운 것으로는 탈레주 사원, 칼 바이라브 신상, 나우탈레 더르바르, 국왕 즉위식 장소인 나살 초크, 가디 바이타크(Gaddi Baithak, 유럽풍의 흰색 왕궁), 프라타프 말라(Pratap Malla) 왕의 동상, 큰 종, 큰 북, 자가나트 사원이 있다.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약 14㎞ 떨어진 성스러운 바그마티 강 맞은편에 있는 랄릿푸르는 역사적·문화적으로 흥미로운 도시다. 박타푸르는 해발고도 1,401m에 위치해 있는데, 소라고둥처럼 생긴 이곳은 ‘신자의 도시’라는 뜻이다.<인터넷 자료 인용>


화려한 문화유산의 중심인 박타푸르 더르바르 광장에 섰다. 고대 왕궁과 아름다운 사원들이 모여 있는 곳,


























네팔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공산당의 활동이 보장되는 나라 같았다. 네팔 공산당 전당대회로 예상되는 행사가 광장과 광장을 잇는 골목을 지나가며 이어지고 있다. 공산당원들과 그 가족들로 보이는 남녀노소들이 칼 막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등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숱한 깃발과 악기를 동원하고 구호를 외치면서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박타푸르는 전통공예로도 유명한데 특히 도예광장(Pottery Square)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라는 평가다. 손으로 빚은 작품 하나하나가 예술인 만큼 관심있게 바라보면서 능력이 되면 직접 구매도 가능할 것이다.





박타푸르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 중 하나가 주주 다우(Juju Dhau)이다. 왕의 요커트라는 별명을 가진 이 전통 디저트는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특징으로 한 입 먹어보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이 인상적이다. 또 그 위에 얹어주는 쫀득한 것 또한 그 풍미를 더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패스트푸드점에 들어왔다. 서비스를 담당하는 젊은 남녀가 한국말을 하면서 우리 일행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정우와 태국은 샌드위치를, 나머지는 햄버거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비교적 푸짐했다.




식사 후 찾은 곳이 부다나트 대탑이다. 약 4세기에서 5세기 정도에 불사가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높이가 무려 36미터나 된다. 웅장한 불교 유산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부다나트의 역사는 매혹적이고 수수께끼 같다. 이 사리탑은 여러 가지 풍습과 신화를 가지고 있다. 절묘한 사리탑의 이야기는 예술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티베트어 버전은 아마도 탄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할 것이다. 부다나트의 첫 번째 사리탑은 600년 이후에 세워졌다. 티베트 통치자 송첸 감포가 불교를 고수한 후에 지어졌다. 네팔의 다른 기념물은 선의 위엄과 섬세함에 있어서 부다나트와 비교할 수 없다. 이 기념물은 석고로 만든 정수리부터 부처님의 전지전능한 눈이 새겨진 반짝이는 구조물까지 정확한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 주민에 따르면, 불교 사당은 수년 전 이 사당에 영향을 받은 한 노년 여성이 지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 여성이 군주에게 땅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군주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게다가, 반면에 보살은 그의 안으로 들어와서 그에게 그렇게 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그 여인은 돔을 짓기 시작했고, 그녀의 네 아들은 그것을 끝냈다. 이것은 부다나트의 적절하고 합법적인 형성을 명확히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14세기에 이루어졌다.


정우가 마니차를 돌리고 있는데 손의 위치가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마니차의 아랫부분을 만지며 돌리는 게 맞다고 한다. 돌리기만 해도 경전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부다나트사원의 출입구 부분이다. 사원을 다 둘러보고 나서 차를 타고 파슈파티나트 사원으로 이동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20여분!


이곳은 맨발로 출입해야 하는데 힌두교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문이 보인다.


입장권의 사진이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은 카트만두 계곡에서 북동쪽으로 5㎞ 떨어진 중요한 힌두 사원이다. 이곳은 네팔에서 가장 신성한 힌두교 성지이자 인도 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큰 시바 유적으로, 신성한 바그마티강 둑을 따라 수백 년 동안 사원, 아슈람(힌두교 수행자의 마을), 그림, 비문들을 모아 놓은 거대한 전시관이다. ‘시바라티’ 또는 '시바신의 밤'이라고 불리는 의식 때는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은 네팔 주민에게도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수 천의 주민이 이곳을 방문하여 시바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또 파슈파티나트 사원과 바그마티 강변에 있는 가트는 화장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시바와 파르바티가 바그마티강 동쪽 숲에서 영양의 모습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나중에 신들이 그를 따라잡아 그의 뿔 중 하나를 잡아 신성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부러진 뿔은 린가로 숭배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땅에 묻혀 잃어버리게 되었다. 수세기 후, 한 목동이 자기 소 중 하나가 땅에 우유를 쏟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자리를 파헤쳐 신성한 파슈파티나트의 링가를 발견했다.
힌두교는 인도와 네팔 그리고 동남아에 널리 퍼져 있어서 인도나 네팔에서 보는 사찰은 대부분 힌두교 사찰이며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도 힌두교 사원이다. 그리고 동남아 여행을 하다 보면 길거리에 원숭이 모습이나 코끼리 모습을 한 신상들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신들은 힌두교와 관련된 신들이다. 전 세계인구 75억 중에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9억 명이나 되니 상식적인 선에서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은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이다. 이를 트리무리티(Trimūrithi, 삼주신)라고 하는데, 각각 우주의 창조, 유지, 파괴를 주관한다. 브라흐마는 신으로 인정이 되지만 이름으로만 존재하며, 비슈누와 시바가 실재하는 신으로서 세상을 관장한다. 많은 신도가 비슈누와 시바를 믿는데, 그리하여 힌두교의 2대 종파가 형성되었다.
힌두교에는 비슈누와 시바에 관한 신화가 많다. 기본적으로 비슈누 신은 태양신으로서 제례와 관련이 깊으며, 명랑하고 전통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반면, 시바 신은 가축 떼의 우두머리로 산중에 살면서 제사를 줄이고, 흉포하고 음산한 양상을 띤다. 비슈누는 대해의 바닥에서 아내인 슈리 라크슈미를 껴안고 뱀의 왕 셰샤를 베개 삼아 편안히 잠을 자는데, 유사시에는 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악마를 물리치고 정의를 지킨다. 특히 비슈누는 가장 자비로운 신으로 세상을 구제하는 수호신으로서의 위상이 높다.
세계의 질서와 도덕의 위기가 다가오면 아바타라(Avatara)가 인간 세상을 구원하러 온다고 한다. 즉 비슈누 신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인간으로 형상을 바꾼 화신(化身)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현재까지 등장한 대표적인 아바타라는, 마츠야(Matsya, 물고기), 쿠르마(Kurma, 거북이), 바라하(Varāhā, 멧돼지), 나라심하(Narasiṁha, 반인반수), 바마나(Vāmana, 난쟁이), 파라슈라마(Paraśrama), 라마(Rāma), 크리슈나(Kṛiṣhṇa), 부처(Gautama Buddha)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할 아바타라는 칼키(Kalki, 백마)이다. 인도 신화로 알려진 《파드마 푸라나》에 따르면 열 번째의 화신이자 예언자적 구원자인 칼키가 암흑과 다툼의 시대인 칼리 유가의 말기에 출현해 타락한 세상을 파괴하여 평화 중심의 신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한다. 힌두 전통에 따르면, 현 시대가 칼리 유가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슈누는 구세주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성격이 유일신교적 신애(信愛)의 정신을 고취시켰다고 한다. 불교의 화신불 개념도 이 아바타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비하여 시바 신은 요괴와 괴물의 우두머리로서 화장터를 방황하며, 전신에는 시체의 재를 바르고 코끼리 가죽을 걸치고 있다. 큰뱀을 띠로 두르고 심산영봉인 카이라사에서 심한 고행을 한다고 하며, 히말라야산의 딸 우마와 파르바티 등을 아내로 여긴다. 시바의 아들은 군신인 스칸다이다. 시바 신과 여신들은 광폭하고 방탕한 성격을 농후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다크샤 프라쟈파티의 제식에 불청객으로 쳐들어가 제사를 방해하고, 사슴이 되어 도망치는 제사 행렬을 쫓아가 고행에 장애가 되는 사랑의 신을 불태워 죽인 후, 흉폭한 산간민 키라타의 우두머리로서 군림한다고 한다. 먼 옛날부터 가무음곡의 수호신으로서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예 작품이 이 신에게 바쳐졌다.
인도의 신화는 베다 시대의 신화와 힌두교 신화로 나눌 수 있다. 《베다》에 등장하는 신들은 태양, 불, 바람, 비와 번개 등 자연현상에서 연원하는 것이 많다. 천둥과 번개로 상징되는 인드라는 무용(武勇)의 신으로서 금강저를 가지고 있으며, 신의 술인 ‘소마’를 마셔 슬기를 기른다. 인간 세계에 물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도 한 인드라는 폭풍의 신인 마루트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악마 브리트라를 물리친다. 제사의 뜨락을 비추는 불의 신 ‘아그니’는 신들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으로서, 제주의 손님이 되어 불에 바쳐진 제물을 천상으로 운반한다고 여긴다. 율법의 신 바루나는 우주적 질서인 리타(Rta)를 지니며, 일월(日月)의 운행과 사계의 순환을 주관한다. 그리고 탐정을 보내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고 동아줄로 악인을 징계한다. 바루나는 계약의 신인 미트라, 관대의 신격화인 아리아만과 함께 아디티야(해와 달의 운행 혹은 자연의 질서를 뜻함.) 삼신으로 알려졌다. 바루나도 옛날부터 물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일체의 만상을 키우고 생물에 활기를 불어넣는 태양은 수리아, 사비트리, 푸샨, 비슈누 등의 이름으로 숭배된다. 이외에 여신으로 그리스의 ‘로고스’(말)와 비교되는 말의 신(言神) 바치, 일체를 간직 하고 풍양을 베푸는 대지의 신격화인 푸리티비, 밤의 정령 라트리, 숲의 정령 아라니야니, 강의 정령 사라스마티 등의 신이 있다. 특히 동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새벽녘의 여신은 ‘우샤스’인데, 이 신에 대한 묘사에서 고대 인도인의 가련한 처녀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의 신화와 비교할 때 베다의 신들은 종교적 색채가 짙고, 각자 독립성이 강하다. 그리고 상호간 친족관계를 나타내는 계보가 분명하지 않다.
이 외에 세계의 수호신으로서 동서남북으로 인드라, 바루나, 야마, 쿠베라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인드라와 바루나는 《베다》에서 등장하는 신이다. 반면, 야마는 원래 사자 나라의 왕(불교의 염라대왕) 으로서 밝은 측면을 띠고 있었지만, 힌두교에서는 검붉게 빛나는 피부에 누런 옷을 걸치고 손에는 새끼줄을 들고 있다. 인간의 몸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영혼을 사정없이 뽑아가 버리는 사신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신이라기보다 악인을 징계하는 율법적 성격이 강한 점은, ‘다르마라자’(dharmarāja: 법 의 왕)라는 별명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쿠베라는 재화와 보물의 신으로, 히말라야의 카이라사 산정에 있는 아름다운 아라카 궁전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실상 요괴, 야차, 나찰의 우두머리로서, 명랑한 성격은 없어 보인다. 이 신들은 옛날 유해를 휘저어 불로불사의 묘약 아무리타를 만들어 마심으로써 불사의 힘을 얻었다고 한다. 악마 라푸는 아무리타를 마시는 신들 틈에 몰래 끼어들었다가 일월(日月)의 최고 신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타가 이미 그의 목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목만이 불사의 부분이 되었다고 전한다. 고자질에 원한을 품은 라푸는 가끔 일월을 침식하여 지금도 목 부분을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후세의 철학적 사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우주 창조 신화도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깊디깊은 물속에 ‘황금의 태아’가 잉태되어, 거기에서 신들이 태어나 태양과 교접함으로써 산과 바다가 생겨났다고 전한다. 그리고 유와 무도 없던 태고의 암흑 속에서 잠자고 있는 유일한 중성적 원리에서 일체가 개벽했다. 최초의 인류인 원인(原人) 푸르샤를 신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 신체의 각 부분에서 삼라만상과 4계급이 생겼다는 거인해체 신화 등도 이 신화에 포함되어 있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홍수 신화, 오직 혼자 살아남은 인간의 조상 마누가 겪은 고행 덕분에 인류가 번영하였다는 전설도 이 신화와 함께 전해오고 있다.
힌두교에는 사성제도가 있는데 첫째는 제사장 계급에 속하는 브라만, 둘째는 무사 계급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셋째는 상공인이나 농부 등 장인계급에 속하는 바이샤, 넷째는 단순노동자 계급이나 농부 등 장인 계급에 속하는 슈드라이다. 그 밑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이른바 불가촉 천민이 있다. 이 네 계급이 각각 신의 입, 팔, 넓적다리, 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태어난 계급에 맞는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거기에 따른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종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생에서 자신의 계급에서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 더 위의 계급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힌두교에서는 삶의 목적을 첫째는 즐거움, 둘째는 재산, 셋째는 의무, 넷째는 해탈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시바신을 가장 중요한 신으로 생각하는데 시바신은 링감(보통은 '링가'라고 많이 불림)이라고 하는 남근으로 상징하며 힌두교 사원의 중심에는 시바의 남근인 링감(Linggam)과 결합된 시바의 부인의 삭티의 여근인 요니(Yoni)가 결합된 상을 모셔두고 있다. 링감은 영원한 생명력의 싹으로 해석이 된다고 하니 링감과 요니의 결합은 우주의 양적 에너지와 음적 에너지의 결합으로 생명의 잉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 자료를 인용한 것임)








시신을 태우고 있는 화장장,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오랜동안 지켜보았던 갠지즈강 가트가 연상되는 곳이었다. 갠지즈강에서의 화장 의식은 철저히 전통과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한다. 잠시 인터넷 자료를 인용한다.
힌두의 장례는 망자의 영혼을 해방시켜 윤회에서 온전한 삶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힌두교가 다수인 인도인들에게 중요한 과정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죽음을 “목샤(자유)”로 부르는데요, 영원한 자유로 가는 관문이 죽음이며 이승에서 사용한 육신은 껍데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0억 인도인의 80% 이상이 전통화장 방식으로 장례를 치릅니다.
장례절차
인도에서의 장례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 임종에 이른 사람의 속죄 의식
– 둘째 임종 후의 화장
– 셋째 화장 후 3일째 수골제(화장 후 남은 뼈를 모으는 의식)
– 넷째 11일째의 슈라다라는 천도제
※ 물론 카스트 계급에 따라, 재정적인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장례방법
– 대개 여자들은 집에서 고인을 애도하고 화장지에서는 상주의 인도하에 남자들만 갑니다.
– 이때 두 개의 항아리를 들고 간다고 하는데, 하나는 성스러운 물이 담긴 것이고 하나는 불의 의례에서 남긴 불씨라고 합니다.
– 화장터에 도착하면 상주는 시신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죽은 자의 입에 다섯 가지 성스러운 물건(소똥, 소오줌, 우유, 우유기름, 응유)를 넣습니다. 소똥 뭉치를 시신의 가슴이나 배에 올려놓은 뒤, 고인에게 꽃을 바치고 주문을 외우고, 향을 사르고, 성수를 바치고, 쌀떡을 입에 넣어주는 등의 의식을 치룹니다.
– 상주는 화장터를 지키면서 두개골이 파열되는지를 살피고, 파열되지 않았으면 대나무 막대기로 쳐서 깹니다. 갇혀 있던 혼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 이후에는 화장을 한 뒤 유골을 흙으로 만든 항아리에 담고, 유골을 담은 항아리를 갠지스 강이나 근방의 시냇물에 던집니다.


이곳 네팔의 화장 풍습도 힌두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어서 인도의 장례절차와 큰 차이는 없다. 흰 칠을 한 석조 건물 안에는 사두들이 수행하는 곳이라 하는데 그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힌두 사원을 들고나는 저 흰 건물, 수많은 교도들이 보이지만 우리들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카트만두 시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하루종일 둘러보면서 피곤한 다리와 컬컬한 목을 달래줄 음식이 드디어 등장했다. 바로 모두가 원했던 삼겹살이다. 돼지고기를 개인별 접시에 1인분씩 담아서 갖다준 것이 특이했는데, 우리의 식욕을 그것만 갖고는 충족되지 않아서 3명 당 2인분을 더 주문해서 먹어야 했다. 소주와 보드카 '8848'(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를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술을 좋아하는 나지만 최근 의사로부터 받은 술을 당분간 끊어보라는 충고를 거절할 수 없기에 오늘도 나는 술을 권하기만 했다. 내 이름 그대로 '권주'다. '언제쯤 나는 다시 술을 마시면서 제대로 흥얼거릴 수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또 길을 나섰다. 늦은 오후까지는 숙소 가까이 있는 하누만 도카의 더르바르 광장(Durbar Square)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가능했다. 걸어 가도 50분 정도면 접근이 가능하니 충분하게 관광을 즐기다가 늦은 점심을 숙소 네팔짱에 돌아와 맛있게 먹고 여유있게 공항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숙소에서 바라보면 스와암부나트 불교사원이 지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숙소 입구에서 볼 수 있는 네팔짱의 간판, 메뉴와 함께 한식을 전문으로 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여주의 단발머리 보살님의 귀여운 프로필과 우리에게 줄기차게 형님이라 부르는 경기도 안성 여인의 미소같은 이응 받침이 매우 인상적이다.






어디를 가나 전주의 전깃줄이 엉켜진 실타래처럼 매달려 있는데 보기에 민망하다. 언제쯤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까 모를 일이지만 그날이 온다면 네팔도 잘사는 나라가 되어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네팔과 관련한 나무 위키 자료를 인용하여 잠시 살펴 보자.
2024년 UN 통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1397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며, 논외급인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면 남아시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다. 심지어 이조차 21세기 들어 경제발전을 하며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나아진 것이다. 네팔이 사실상 현대에 도입한 1951년 기준으로 네팔에는 학교, 병원, 도로, 통신, 전력, 공무원이 거의 없다시피했으며, 1958년 네팔 최초의 항공사 로열 네팔 항공이 창립되기 전까지 네팔은 국토 절반 이상이 히말라야 산맥 같은 고산지대로 덮여 있는 내륙국인 만큼 사실상 외부와 완전히 고립되었다.
1973년부터 1998년까지 네팔은 단 네 해를 제외하면 언제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10개국 안에 들어가는 나라였고, 심지어 1976 ~ 1991년에는 거의 항상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Top 5에 들어갔다. 당시 네팔은 오가덴 전쟁을 겪은 소말리아 내전을 겪은 후 공산화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꾸준히 경제성장을 해나간 결과 2010년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개국 중 하나에서 벗어났고, 2012~2014년 3년 동안 다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개국 신세로 다시 돌아가는 듯했으나 2015년 이를 탈출했다.
1인당 GDP로 따지면 1970년 기준으로 87달러였던 것이 1974년 100달러를 넘기긴(112달러) 했으나 200달러대를 처음으로 기록한 해가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4년 208달러였을 정도로 성장이 매우 더뎠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나름대로 고도성장을 하기 시작해 왕정이 폐지된 2008년 기준으로 444달러로 2001년의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했고, 2010년 처음 북한을 추월한 후 2013년을 제외하면 항상 북한을 앞서게 되었다. 2019년에는 대망의 1000달러를 돌파(1074달러)했다! 이런 만큼 2024년 유엔 공인 최빈국에서 탈출 예정이다.
도시화율 역시 1960년부터 1973년까지 쭉 4%였고, 1992년에야 10%를 기록했으며, 2003년 15%, 2018년 20%를 기록하여 2023년 현재는 22%다. 이렇듯 인구의 75% 이상, 취업 인구의 81%가 농업에 종사하고 GDP 대비 농업 비중도 2023년 기준 21.2%에 달하는 농업국이다. 농업이 네팔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8%에 달한다. 주요 생산품은 사탕수수와 담배, 과일과 야채, 쌀과 밀 등이 있다. 하지만 고지기후, 계단경작 등의 이유로 생산력은 매우 열악하다. 총 면적의 약 20%만이 경작 가능한 토지이고, 그 외 40.7%는 산림지대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산악지대이다. 가능성 있는 자원으로 관광산업, 수력자원 등이 있으나 아직 개발과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잠재력만 보유한 상태로 남아 있다. 2000년대부터 카펫과 의류 산업을 키워 이들 산업이 네팔 전체 수출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왕정이 폐지된 직후인 2009년 이후 네팔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1년 사이에 투자가 44%가 증가한 기록도 존재한다. 2009년 기준으로 무역수지는 수출이 크게 감소하여 적자폭이 증가하였다. 거기에다 2015년에는 규모 8.1의 대지진이 발생하여 9000명이 죽고 35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가운데 피해액이 네팔 GDP의 35%에 달하며 안 그래도 빈곤하던 국가의 경제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2015년 대지진이 일어난 지 9년이 지났는데도 피해는 거의 복구도 못하고 있는 지경. 2016년 경제성장률이 0.4%를 기록하며 경제위기는 극복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긴 한 정도. 덤으로 2020년부터 코로나 19까지 여파가 들이닥쳐 전세계 관광객이 뚝 줄어 엄청난 경제적 침체에 시달리고 있다. 그나마 2023년 이후로는 관광객들과 해외에서 일하는 자국인 노동자들의 송금이 정상화되어가며 어느 정도 경제가 회복되고 있어서 조만간 파키스탄의 1인당 GDP를 추월하는 게 아니냐는 충측도 있다.
2025년 발표된 2023년 세계은행 통계 기준 네팔 1377.6달러, 파키스탄 1365.3달러로 12.3달러 차이로 사상 최초롤 파키스탄의 1인당 GDP를 추월했다. 여하튼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내륙국으로써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히던 데다가 데다가 1990 ~ 2000년대의 정치적 혼란상과 내전, 2010년대의 네팔 대지진, 2020년대의 코로나 19라는 큰 시련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성장을 이어나가 한때 지역강국 취급받던 파키스탄의 1인당 GDP까지 추월한 것은 그야말로 히말라야의 기적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세계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네팔 경제는 2024년 상반기에 서비스 부문의 성장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였다. 특히 관광객 증가와 식음료 서비스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또한, 농업 부문에서는 우호적인 기후와 개선된 씨앗 공급으로 인해 벼 생산이 증가했다. 이에 따라 네팔의 경제 성장률은 2023년의 1.9%에서 2024년에는 3.3%로 예상된다.





저 주황색 꽃의 이름은? 메리골드, 또는 금잔화로 불리는데 꽃타래로 장식할 때 쓰는 꽃이다. 축하, 환영 또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등의 의미을 담고 있어서 결혼식 화환이나 공식적인 한영의 의미를 담은 꽃목걸이로 사용되고 있다. 이 꽃의 향기는 모기를 비롯한 곤충을 쫓아내서 가정집에는 문앞에 거는 장식으로도 사용한다. 화장장의 시신 주변에 화려하게 장식된 꽃들이 금잔화였음을 볼 때 고인의 극락왕생 또는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비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네팔의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를 보기 위해 쿠마리 사원으로 들어갔다. 만 5세 안 쪽의 아주 어린 여자아이를 선발하여 살아 있는 여신으로 섬기는데 힌두교의 여신인 탈레주와 두르가, 그리고 밀교의 여신인 바즈라 데비의 화신으로 섬기는 것이다.(이하의 내용은 인터넷 자료임)
피는 불경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쿠마리 활동 중에 월경이 시작되거나 상처 등으로 인해 피를 흘리면 은퇴한다. 현재 월경이나 피를 흘리는 등 여러 이유로 쿠마리에서 은퇴한 소녀들은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다. 웹툰 '시타를 위하여'에서는 쿠마리였던 시타가 맨몸으로 쫓겨나고 가는 곳마다 죄인 취급받거나 천대받는 걸로 묘사되는데, 20세기 이전에는 이처럼 은퇴한 쿠마리에 대한 온갖 편견과 천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사원 안에서만 자랐던 쿠마리들이 나중에 사회에 나가 혼자서 잘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20세기까지 네팔 정부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동 인권에 민감한 서방에서 많은 지적을 받았는데, 21세기 들어서 조금씩 쿠마리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주는 등 조금씩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여신으로 섬겨지는 만큼 쿠마리로 선발되는 과정이 까다로운데 우선 네와르 족 중에서 석가모니의 후계자라고 여겨지는 성씨인 샤캬 혹은 바즈라차르야 가문의 초경을 겪지 않은 3~6세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 중에서 선발하며 외모에 대한 심사도 무려 32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알려진 외모 선발 기준에 비해 외모에 대한 심사는 별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네팔의 쿠마리 시스템은 각 도시와 마을에 총 11명의 쿠마리가 있는데 로열 쿠마리와 로컬 쿠마리로 나눠지며 이를 합쳐서 쿠마리스라고 한다. 즉, 탈레주 여신은 한 소녀의 몸에 깃든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소녀들의 몸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로얄 쿠마리는 카트만두에 있는 쿠마리 사원의 쿠마리, 즉 왕실 쿠마리이자 11명의 쿠마리 중 가장 대표적인 쿠마리이며 로컬 쿠마리는 카트만두의 쿠마리를 제외한 10개 지역의 쿠마리를 말한다.
쿠마리가 되는 과정은 퍽 까다롭다. 몸에 상처가 없어야 하고, 특정 가문 출신이어야 하는 등이다. 힌두교 및 밀교의 여신이 세상에 현신한 것으로 추앙받는 존재이지만 아동 착취라고 비판도 받는다. 쿠마리가 되면 무표정을 유지해야 하고 직접 걸어서도 안 되기에 이동할 때도 어른이 업어주거나 가마를 타야 한다. 아무런 일도 해선 안 된다. 과거 이런 원칙들이 더 엄격히 지켜졌을 당시 쿠마리들은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운동 부족 때문에 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은퇴 후 여러 고충을 겪었다.
현재 쿠마리가 있는 곳으로 밝혀진 지역은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 바그마티, 상쿠, 토카, 킬라갈, 과바할이 있다. 아직 나머지 3군데는 밝혀지지 않았다.








오전 10시 30분에 쿠마리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여 10분 남짓 기다려 보았는데, 과연 약속시간 1,2분이 지나자 출입구 맞은 편 3층 창문에 진한 화장을 하고 독특한 모자를 쓴 쿠마리가 30여 초 가량 얼굴을 내 보이고는 이내 사라졌다.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절대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어서 사진에 담지는 못했으나 어린 쿠마리의 삶은 어떤지, 또 쿠마리 생활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지 퍽 궁금해진다.







입술이 이미 터진 나의 큰 얼굴,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라서 괴롭긴 하지만 친구들과 카트만두의 세계적인 유산을 감상하면서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박물관 내부도 잠시 둘러보았다.


노란옷을 입고 하얀 턱수염을 기른 분은 어떤 분? '사두(sadhu)'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힌두교, 자이나교 등의 종교에서 수행활동을 하는 고행자를 가리킨다. 얼굴에 분칠을 하고 다니며 주로 노인인 경우가 많고 종교적 목적으로 걸식과 탁발 생활을 하는 전문 출가 수행승이다. 고행을 통해 카르마를 소진시키고 궁극적으로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도 전통적인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분은 진정한 수행승이 아닌 것 같았다. 모습은 사두 같은데, 다가와 사진을 찍는 분들에게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이비임에 틀림없을 거라는 결론을 냈다.















이럭저럭 약 2시간 정도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 동안 더르바르 광장 주변의 숱한 유적지와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보았고 Kanti Pass를 통과하며 걷다가 과일 가게에 들렀다. 바나나와 사과를 조금 사서 꿈의 공원(The Garden of Dreams)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한 잔씩 하면서 쉬다가 움직이는 것으로 했다.


꿈의 공원 입구에 들어서니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었다. 공원인데 입장료? 일단 공원 안에 있는 찻집에 들러 잠시 쉬다가 공원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기로 한다.




다람쥐 한 마리가 출현했다. 주춤주춤 경계를 하는 듯 하더니 우리를 곁으로 슬며시 다가오더니 뭔가 먹을 것을 좀 달라는 듯한 눈치다. 사과를 조금 떼어 손바닥에 올려 놓으니 다가와서 낼름 물어다가 오물거리며 귀엽게 먹는다. 이젠 우리 사람들이 전혀 두렵지 않고 친절한 존재들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팔에 와서 끊임없이 마시고 있는 생강차, 특히 고산병 예방에 좋다고 해서 자주 마셨던 것이다. 오늘 하루종일 재채기를 하고 감기 몸살 기운이 점점 깊어지고 있으니 이 차를 마시면 금방 나아지겠지?





지금까지 걸어다녔던 카트만두 시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공원이다. 예쁜 꽃과 잘생긴 나무, 잘 정돈된 주변 환경, 여유 넘치는 사람들의 미소가 눈에 들어오는 매력적인 공간이긴 하다. 다만 높은 담장으로 폐쇄되어 있고 계급 낮은 서민들의 접근은 쉽지 않은 곳 같아서 씁쓸하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숱한 산과 골짜기를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성취감을 만끽했던 우리들이 마무리삼아 이 꿈의 공원에서 정리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다.


트레킹 내내 나의 룸메이트였던 정우, 나처럼 흰수염을 자랑하더니 오늘 아침 면도를 했다. 나보다 키가 무려 5센티가 더 크니 그 옆에 서면 나는 작아보일 수밖에 없다. 여하튼 그 동안 나를 잘 챙겨줬던 친구라서 매우 고맙다.

족장인 창열이는 작년 캐나다 로키 트레킹에 이어 이번 ABC 트레킹도 함께하자며 많이 부추긴 바 있는데 덕분에 트레킹에 성공하고 웃을 수 있게 돼서 참 기쁘다. 앞으로 남미의 유유니 사막, 파타고니아 빙하 트레킹을 함께할 기회가 또 왔으면 좋겠다.

태국이는 이번 트레킹에서 등산화, 아이젠, 선글라스 등의 준비 부족으로 조금은 힘들었을 것 같다. 평소 체력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있어 했는데 예기치 못한 속 불편함과 무릎 부상까지 겹쳐서 말못할 고생을 했다. 그러나 친구들을 배려하는 인간미와 때묻지 않은 순수성만큼은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휘동이, 자신의 등산화 끈에 걸려넘어지는 실수가 첫날 있었지만 시종일관 우리팀의 총무로서 재정관리를 야무지게 잘 해주었다. 주변의 친구들의 안전과 건강상태까지 챙기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쳐서 힘들어 하는 우리들에게 흥겨운 노래도 간간이 선물했다. 고맙고 미안했다.

네팔의 히말라야 길가에는 앵초와 같은 꽃들이 무수히 피어서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여 환한 미소를 던졌고 그것을 본 사람들도 그 예쁜 자태에 힘을 얻어 더욱 열심히 걷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울산의 춘수도 이번 여행에서 역할을 다했다. 숱한 등산의 경험을 되살려서 기본적으로 준비한 간식,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등이 친구들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쓰였는지 모른다. 그의 치밀한 준비 덕분에 모두가 원활하게 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공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비해 나는 특별한 공이 없다. 다만 친구들의 스냅사진을 비교적 자주 찍어 주었다는 것, 여행의 기록을 사진과 함께 투박한 글로나마 써서 남기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꿈의 정원에서 한참을 놀다가 오후 4시쯤 숙소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들었다. 내가 주문해서 먹었던 김치찌개 맛은 압권이었음을 밝힌다. 공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 숙소 입구에서 주인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틀 동안 잘 먹고 맘 편하게 묵을 수 있었던 것에 깊이 감사하면서.

봉고 차 위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분은 네팔짱 숙소의 직원인데 그간 카트만두 시내 투어 및 문화답사, 방금 공항까지 태워주기 등 많은 친절을 베풀어 주신 분이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시원찮은 영어 발음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간 당신이 보여준 친절함에 감사한다. Thank you for your kindness!!!'

귀국하는 길은 네팔에 입국할 때와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다시 타이항공으로 방콕으로 날아가 공항 내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인천행 타이항공을 갈아타야 하는 것이다. 썩 익숙한 코스라서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공항내에서 혹시 다른 친구에게 감기를 옮길까 싶어서 마스크를 썼다.

염려에도 불구하고 휘동이는 이미 나에게 감염되었는지 목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종합감기약을 주면서까지 친절을 베푼 그에게 감기까지 옮기게 되었으니 '빚을 원수로 갚은 격' 같아서 퍽 미안하다.ㅠㅠ
6명의 친구들, 모두 고맙다. 늘그막에 시도해 보았던 ABC 트레킹, 혼자는 불가능했을 텐데 함께여서 너무 든든했고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평생 잊지못할 추억을 쌓았음에 기뻐하고 아직 늙지 않았음을 확인했으니 기회가 되면 또다른 트레킹을 기대해도 되겠지? 머지않아 또 한번 만나 잠재된 호연지기를 펼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동안 우리의 ABC 트레킹을 성원해 주고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준 가족과 친구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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