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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유럽6개국(서유럽)을 다녀와서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0. 2. 2.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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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해가 떴다. 새해가 두 번 밝았다. 첫 번째 해는 비행기 안에서 시계로 확인한 한국의 새해였고, 두 번째 해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호텔에서 맞은 유럽의 새해였다. 열 한 시간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동유럽 관광을 위해 찾았던 2008년 여름의 프랑크푸르트, 금융과 교통의 중심지, 국제 도서 박람회가 열리는 그 도시를 겨울에 다시 찾으니 공항, 거리, 광장의 풍경이 눈에 익은 이미지로 나타났다. 부정할 수 없는 대문호, 괴테의 생가를 보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로테를 떠올리며 뢰머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짝이는 불빛을 온 몸에 주렁주렁 매단 광장의 나무가 우리를 반겨 맞았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깜박이면서. 자유 시간을 얻자마자 우리는 라인의 지류인 마인 강을 보러 달려갔다. 다리에 기대어 강 건너 건물 위로 터져 올랐다가 쏟아지는 불꽃 더미를 보았다. 한 해가 바뀌기 직전 이국의 풍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설레는, 섣달 그믐밤의 정취를 느껴가며 IBIS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자정 무렵부터 터지는 폭죽소리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그 소리를 들으며 선잠을 자는 사이에 독일의 새해, 유럽의 새해, 우리의 새해도 밝아왔다.

   나폴리 출신의 마르첼로가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우리에겐 익숙한 곳인 그 곳, 네카 강에 걸쳐진 카를 테어도르 다리를 밟았다. 지혜를 상징하는 원숭이, 부지런함을 뜻하는 쥐가 다리 입구에 조각상으로 얹혀있었다. 고요한 강물 위에 흐르듯 놓인 다리, 건너 편 숲 속엔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들이 거닐었던 철학자들의 산책로가 숨어있어서 호기심어린 상상력이 자극되는 것이었다. 다리에서 몸을 돌리니, 약간 떨어진 언덕 위 고성이 아련한 모습으로 요술처럼 나타났다. 폭격을 맞아 뻥뻥 뚫린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가슴을 살짝 아프게 하는 성, 22만 리터의 와인 저장 오크통이 있는 곳. 일행들과 인솔자가 성에 올라간 사이,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거리를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대학 건물(학생 감옥, 도서관, 기숙사, 학생회관 등)을 보고, 골목골목 누비며 사진을 찍으며 일행과 만날 지점으로 갔다. 한국관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1년 반 만에 찾은 음식점인데 음식의 질이 전보다 못하다는 느낌이다.

  오후엔 먼 길을 달려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이동해야 했다. 버스에 실려 정신없이 가다보니 이윽고 닿게 된 인스부르크는, 인 강에 놓인 다리, 라는 뜻으로서 고대 로마인들이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다소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그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를 거닐며 아름다운 풍광을 렌즈와 마음에 담았다. 종이봉지에 담긴 감자튀김을 사서 입에 하나씩 넣으며 걸어 다녔다. 막스밀리언 대제가 그 거리에서 공연되는 행사를 내려다본, 발코니의 지붕을 황금으로 씌웠다는 황금 지붕, 밤이었음에도, 노오랗게 품격있는 금박 장식이 두드러졌다. 낭만적인 밤골목을 거닐다 보니, 유명 인사들이 묵었던 기록이 새겨진 돌판이 나타났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볼프강 아마데우스 폰 모차르트 등 그 이름들을 보노라니 마치 그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록이란 이래서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경을 넘어 소복소복 눈덮힌 산길을 돌아 이탈리아 볼차노에 닿았다. 좁은 눈길을 운전한 마르첼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밤의 곡예 운전 끝에 운치 있는 산장 호텔에 도착했다. 계란 스프, 샐러드, 스파게티, 스테이크, 이탈리아 음식이 나왔다. 본격적인 이탈리아 관광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눈쌓인 웅장한 산맥의 흐름을 보며 몇 시간을 달려 이르게 된 곳은 베네치아(베니스)였다. 석호 위에 백양목을 주춧돌 삼아 세웠다는 도시, 그 독특하고 신비로운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자유의 다리를 건너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의 베네치아로 들어가야 했다. 시원하게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배 안에서 현지 가이드 이성호님의 설명을 들으며 유태인 거주 구역, 무라노 섬, 베니스 영화제가 열린다는 리도 섬 등을 건너다 보거나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리도 섬을 밟았겠지) 정말 신기한 도시라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바다를 메워 번화한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도대체 누가 맨 먼저 한 것일까? 그 많은 건축 자재를 육지에서 운반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비발디 생가 앞에서 수신기를 받아 베네치아 특유의 좁고 질척질척한 골목을 빠져나가니 두칼레 궁에 이어진 탄식의 다리가 나타났다. 정치범이나 흉악범들이 지하 감옥에 갇히기 직전,  작은 꽃무늬의 창살 너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다와 멋진 도시를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는 다리, 사상범으로 갇혔던 카사노바가 여인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는 그 다리, 이름과 걸맞지 않게 어여쁘고 앙증맞은 다리였다. 행정 관청이었던 두칼레 궁은 하얀 색과 연분홍색 대리석의 레이스 뜨기로 이어진 듯, 섬세한 장식이 돋보인 건물이었다. 그 옆으로 이어진 산 마르코 성당,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 온 산 마르코의 유골이 지하에 안치된 성당, 황금 장식과 모자이크가 어우러진 비잔틴 양식의 건물인 까닭은 아마도 지리적 영향일 것이다.

  성당 앞 ㄷ자로 넓게 펼쳐진 산 마르코 광장으로 나갔다.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극찬한 광장엔 비에 젖은 비둘기 무리가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과 붙어있는 아케이드의 전통 유리 공예 공장에서 유리 제품 만들기를 보았다. 전통 기법의 수제 유리 제품이 순식간에 어찌나 예쁘게 만들어지던지! 감탄을 하며 그 곳을 나와 광장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헤밍웨이, 바이런, 카사노바, 바그너, 푸치니, 비발디, 괴테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찾아서 글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는 카페 플로리안, 유리 벽 밖에서 사진만 찍었다. 대신 광장 밖 바닷가에서 쇼콜라 젤라또(아이스크림)를 먹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곧 젤라또의 향긋하고 부드러운 감촉으로 빠져들었다. 

  항구에서 수상 택시를 탔다. 도시를 S자로 가로지르는 카날레 그란데(대운하) 사이로 우리는 달리는 것이었다. 좁은 물길 사이를 빠져나가며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하면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레알토 다리, 카 도로 궁, 카 페사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이 전시되는 현대 미술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등, 유서깊고 의미깃든 건물들이 휙휙 눈 옆으로 지나갔다. 곤돌라, 수상 버스, 수상택시들이 수로 위에 떠 다니고, 우리는 신선놀음하는 기분으로 서늘한 바닷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물고기처럼 꿈처럼 바다 위에 떠다니며 주변 풍광에 눈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어느 순간 갑자기 수상 택시의 속도가 빨라지는가 싶더니, 시야가 탁 트이며 드넓은 바다가 나타나며 이내 아드리아 해의 항구에 닿았다. 찬 바닷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 가게에 진열된 베네치아 고유의 가면들을 구경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시종일관 우리들의 혼을 쏙 뺀 유머 만점의 현지 가이드, 이성호님의 특별 노래 선물 ‘오 솔레미오’를 들으며 베네치아를 정리해 보았다. 참으로 기이한 도시, 환상처럼 아스라이 스쳐간 베네치아, 충격적일 만큼 독특한 매력의 도시로 뇌리에 간직될 것이다.

(단언하건대, 그런 도시 또 없습니다!) 


  이어지는 버스 이동쯤이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휴게소에서 산 젤라또, 맥주, 피자를 간간이 먹으며 버스에 올라 창 너머 펼쳐지는 경치를 맘껏 누렸다. 인솔자 영진씨가  버스에서 틀어 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눈여겨보는 사이, 구릉 위의 집들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지, 르네상스를 꽃피운 메디치 가의 고향,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장, 그 피렌체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꽃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소박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피렌체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고향이기도 하다. 복원 미술을 전공한 현지 가이드 키에라(안영희)님과 만났다. 산타 크로체 성당을 지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꽃의 마리아 대성당)로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몇 백 년 전의 도시다운 흔적, 말고삐를 매어놓았던 쇠고리가 다양한 모양으로 집집마다 붙어있었다. 브루넬리스키가 설계한 아름다운 쿠폴라가 눈 앞에 짠하니 나타났다. 예쁘고 멋있고 훌륭한, 건축 공법의 승리라고 하는 쿠폴라, 463개의 꼬불꼬불한 계단을 오르면 피렌체 시가가 내려다 보이는데, 좋은 사람끼리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전설을 믿고, 적잖은 사람들이 좁은 계단을 오른다. 초록색, 흰 색, 분홍색 대리석으로 화사하게 꾸며진 대성당 외관, 어쩌면 이토록 예쁘게 장식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의 탁월한 미적 감각이 마음을 홀린다. 대성당 옆 길고 높다랗게 치솟아 있는 조토의 종탑, 그 어떤 탑이 이만큼 멋질 수 있으랴!  대성당 앞 세례당엔 북, 남, 동으로 난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동문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천국의 문’으로 명명한 청동 문이다. 기베르티가 27년이나 걸려 완성한 문, 처음엔 청동으로 만들어졌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황금색으로 바뀌는 바람에, 한결 더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한다. 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더니 인물의 빛이 사라지고 만다. 마차를 끄는 말을 피하며 좁은 골목 사이로 나오니 단테 생가가 나왔다. 르네상스가 꽃핀 도시에서 지나친 풍요로 인해 타락해가는 사람들에게 도덕을 일깨워 준 단테, 소박하고 조촐한 집이었다. 철학과 문학의 크기란? 그런 생각을 하며 시뇨리아 광장으로 걸었다.

  광장엔 피렌체 공화국의 정부 청사였으며 지금도 일부가 시청으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이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베키오 궁에 붙은 100미터에 가까운 아르놀포의 탑이 자꾸만 아래로 쏟아질 것 같아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 쪽으로 쏠리려는 시선을 돌려 다비드 동상을 보러 갔다.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25살에 만들었다는 다비드 상, 젊고 잘 생긴 근육질의 사나이는 햇살 아래 눈부신 나체를 뽐내고 있다. 사람들의 카메라 세례가 쉴 새없이 터지는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다. 베키오 궁에 인접한 우피치 미술관을 찾고 싶었더랬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카라바조의 ‘바쿠스’ 등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득한 그 곳. 기회가 또 온다면 베키오 다리와 함께 꼭 찾아볼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버스에 올라 아르노 강을 건넜다. 로마로 가는 길은 연휴 마지막 날이라서 긴 여정이었다. 도중에 내려 올리브 가게에 들렀다. 건강에 좋다는 발사믹 식초와 아토피에 좋다는 올리브 비누 여러 개를 샀다.

  사흘을 묵기로 되어있는 로마의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어서 저녁마다 한식이 나온다니 기대가 된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오징어볶음…….


  로마 관광이 시작되었다. 바티칸으로 들어가기 위한 줄을 섰다. 여름엔 땡볕아래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한다는데, 또아리를 튼 듯 길었던 줄은 출입구 문이 열리자 금세 줄어들었다. 수신기를 받아들고 바티칸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이탈리아 지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프라 안젤리코, 포를리, 티치아노, 조토, 카라바조 등 유명 작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라파엘로의 방 한 쪽 면을 차지한 그림 ‘아테네 학당’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들 사이로 걸어 나오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인데,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습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얼굴은 건축가 브라만테의 모습으로 그려놓은 것이 숨은그림찾기처럼 은근한 재미를 부여한 것이다. 교황의 예배당인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르고 만다. 거장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정을 뒤덮은 벽화, ‘천지창조’와 벽 한 면을 채운 그림 ‘최후의 심판’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는 까닭이다. 프레스코 그림의 속성상 회반죽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미켈란젤로는 목을 뒤로 젖힌 상태로 4년 동안 천정화를 그렸고, 다 그린 후엔 몇 달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워져서 누워 지내야 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강렬한 집념과 에너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천정화를 올려다보거나 벽화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라도 저절로 경건해지고 마는 성 베드로 성당 안으로 행렬이 들어섰다. 로마 카톨릭의 본산인 대성당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베르니니의 솜씨로 설계되고 세워져서 꾸며진 곳이다. 내부의 길이는 200미터가 넘을 정도이고, 베르니니가 제작한 발다키노 제대, 대주교좌,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천정의 돔 등 멋있지 않은 것이 없다. 엄숙한 분위기에 취해 있다가 성당을 나오면, 268개의 열주가 두 팔을 벌리고 늘어서 있다. 기둥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장식물(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성인, 사도상)들이 얹혀 있다. 세속을 향해 팔을 벌린 종교의 넉넉한 품 같다고나 할까.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 가운데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경이로운 마음으로 그 곳을 빠져나온 우리는 판테온으로 향했다. BC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자 2인자 아그리파가 만들었다는 만신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구멍 뚫린 돔의 지름과 높이가 각각 43.2 미터인 완벽한 구체, 구멍의 지름이 9미터, 가장 아랫 부분 5.9미터에서 가장 윗부분 1.5미터로 올라갈 수록 두께가 얇아진다. 속을 채운 부자재의 하중이 다르며, 돔 안쪽엔 사각으로 파내어 힘을 분산시킨 과학적 설계,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비가 와도 기류의 흐름에 의해 빗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데 정말 그럴까? 라파엘로와 그의 아내 비비아나가 그 내부에 묻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극찬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조차 -천사의 설계-라는 말로 찬사를 바친 건물이다.

  트레비(삼거리) 분수로 걸음을 옮겼다. BC 1세기에 세워진 비르고 수로 끝자락에 놓인 분수, 라고 부르기엔 너무 멋진 곳이다. 처녀의 샘이라는 이름의 샘물이 찰랑찰랑 고인 곳, 영화의 영향으로 너나 가릴 것 없이 젤라또(아이스크림)를 입에 물었다.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에서 꽃을 사고 머리를 싹뚝 자른 거리를 지나 젤라또를 먹으며 상큼발랄하게 앉아있던 스페인 계단, 그 곳에 오래오래 앉아있고 싶었다. 그녀처럼 계단 한 자락에 걸터앉아 있으면 그레고리 펙이 뛰어 내려올까?

  꽃미남 기사가 모는 벤츠에 올라 팔라티노 언덕, 치르코 마시모(대전차 경기장)로 향했다. 벤허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25만 명을 수용하는 천연 경기장이었다. 사륜마차 경기, 경마, 맹수들의 싸움 등, 놀랍게도 BC 7세기부터 사용된 경기장이다. 2006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탈리아 축구팀의 환영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옮겨간 우리는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 보았다. BC 6세기부터 300년 동안 고대 로마 시민 사회의 중심지였던 곳, 감회가 깊었다. 정치, 종교, 사법, 상업 등, 온갖 사람들의 사회적 행위가 활발하게 열렸을 텐데 원로원 건물의 잔재, 원로원 입구에서 암살당한 카이사르가 급히 화장된 곳, 침략, 약탈, 지진, 토사의 자취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는 카이사르의 유해와 맞물려 우리의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2000년 전의 역사가 시리도록 아프게 하는 풍경 뒤 편으로, 동전의 양면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현재 로마 시장의 집무실과 시의회장이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세나토리오 궁전, 카피톨리니 박물관(콘세르바토리궁 + 누오보 궁)이 얌전히 놓인 캄피돌리오 광장엔, 2000년 전후가 건물 벽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희대의 역작인 그 광장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자 기독교도들이 대부분의 동상을 부쉈는데 그 동상이 살아남은 이유가 참 아이러니컬하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동상으로 잘못 알고 보존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의 동상이었는데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 바닥의 모자이크 장식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가니 베네치아 대사관이 있었던 베네치아 광장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몸을 돌려 세우면, 새하얀 케익같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불과 100 여 년 전, 가리발디 장군의 용맹을 빌어 이탈리아를 통일한 왕이다. 476년간 분열된 나라를 통일한 사보이 왕가의 왕. 엄청난 영웅 대우를 받고 있다. 일행 중에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아이가 있어 엄마와 가이드가 왔던 길을 되짚어 나섰는데, 캄피돌리오에서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서 울고 있던 아이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13살짜리 소년이 얼마나 혼비백산했을까?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가며 ‘진실의 입’을 보러 갔다. 베스타 신전 옆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현관에서 우리의 손을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진실의 입’, 다시한번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의 명장면 명연기를 떠올렸다. 다행히 잘리지 않고 곱게 돌려받은 손을 매만지며 성당을 둘러보고 나왔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가 남았다.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에 도착한 곳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그리고 그 옆에 우람하게 서 있는 콜로세움이었다. 312년 라이벌 막센티우스와 싸워 이긴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을 기려 세운 개선문인데, 벽면의 부조엔 트라이안 포럼에서 떼어온 부조, 빈민에게 빵을 나눠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부조 등이 있다. 이 문은 나중에 나폴레옹 개선문의 원형이 된다. 물론 우리나라 독립문의 원형이기도 하다. 정말 고졸한 멋이 깃들어 있었다. 구석구석 아로새겨진 역사의 숨결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문이었으므로. 바로 옆 콜로세움으로 눈을 돌렸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 착공되어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8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한 원형 경기장이다. 티투스가 데려 온 예루살렘의 포로들이 공사에 동원되었는데 고생 무지하게 많이 했을 것 같다. 모두 4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80개의 아치 문을 통해 20분 이내에 모든 관객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7만 명 이상을 수용하며 도리아식 기둥의 1층은 귀족, 이오니아식 기둥의 2층은 기사, 코린트식 기둥의 3층은 시민들, 4층은 천민, 노예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글래디에이터라는 검투사끼리의 싸움, 노예, 포로와 검투사 사이의 싸움, 검투사와 맹수 사이의 대결이 눈앞에 그려진다.

  스포츠와 정치의 상관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인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우민 정치의 일환으로 간주된다. 국내에서 접한 TV 다큐멘터리로 내부 구조를 익히고 갔음에도, 막상 눈앞에 펼쳐진 콜로세움의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다. 조명이 조금씩 켜지는 콜로세움은 가스등처럼 샛노란 불빛을 내뿜으며 따뜻한 이미지로 우리 곁에 다가서는 것이었다. 숨 가쁜 감격이 밀려왔다. 중세에 군사 요새로 사용되다가 후대로 갈수록 로마의 성당과 궁전 재건축에 사용될 건축 자재로 사용된 나머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음에도 2000년을 꿋꿋이 버텨 온 콜로세움의 매력,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선정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로마에서 가장 멋진 곳, 보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는 곳으로 내게 각인되었다.

 

  이젠 ‘본 조르노’나 ‘그라치에’라는 인사말이 귀에 익고 입에 배었나 보다. 기사에게 ‘본 조르노’를 건네며 폼페이 행 버스에 올랐다. 로마 최초의 도로인 아피아 가도를 빽빽이 덮은 우산 모양의 소나무를 힐끗 바라보며 졸다가 깨다가 하는데, 베수비오 화산이 드러나고, 폼페이 유적지 입구가 가까워졌다. BC 10세기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곳, 도시를 이룬 것은 BC 8세기였다. BC 5세기부터 로마에 속해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중, 63년의 지진, 79년의 화산 폭발로 인해 그만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화산 가스로 질식하여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1748년 독일 탐험가 빙켈만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묻혀있어야 했다. 한 도시를 7미터나 덮어버린 화산 재, 그렇지만 정작 자신은 의구한 자태로, 고고하기까지 한 자세로 폼페이를 내려다보는 베수비오 산! 바실리카, 아폴론 신전, 삼거리 가게, 빵 굽는 화덕과 여러 개의 맷돌을 갖춘 방앗간, 야한 그림들이 그려진 2층 홍등가, 냉탕, 온탕, 환기창이 구비된 공중 목욕장, 연못, 바깥 채의 뜰, 안채의 뜰, 후원까지 정원이 3개나 딸린 ‘파우노의 집’, 화산재에 질식해 죽은 시체의 미라, 미로같은 구조의 ‘신비의 집’까지 이리저리 살펴보노라니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바퀴자국 깊게 패인 마을 중심의 마찻길, 반들반들한 대리석 타일, 거실 바닥의 모자이크 타일 무늬와 방의 벽화 수준은 현대의 감각으로 보아도 무척 아름답고 세련되기 그지없는 양상인데, 그를 통해 2000년 전의 영화를 짐작할 수는 있어도, 사라져 간 문명을 어찌할 것인지? 7미터나 쌓인 도시의 재를 걷어내고 말없이 묻혀져 있던 고대 문명을 발견했을 때, 탐험가 빙켈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자연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 앞에서 더욱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일어나게 되었다. (돌아와서 맞게 되는 아이티의 지진과 폼페이의 유적이 환영처럼 겹쳐진다) 베수비오 산의 말짱한 모습을 등지고 모처럼 한가로운 점심을 먹었다. 해산물 스파게티, 새우 튀김, 카푸치노, 싱싱한 mandarin(귤)을 먹은 후 카프리 섬으로 관광 팀과 남은 팀으로 나뉘어 오후 일정이 진행되었다.  

  쏘렌토로 달리는 버스에 올랐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돌아 발아래 깔린 쏘렌토를 굽어다 보며 마음속에 품은 노래를 불렀다. 깎아지른 절벽, 맑고 푸른 지중해, 붉고 노란 집들이 점점이 수놓인 곳에서. ‘돌아오라 쏘렌토로’와 ‘산타루치아’를 연신 흥얼거리며 바람을 맞았다. 수공예 가구점에서 간단한 쇼핑을 하고 나폴리로 돌아나갔다. 나폴리에서 뜻밖의 선물을 얻었다. 친절한 인솔자 영진씨의 배려로 바닷가에 위치한 까스텔 델 오보(달걀성)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산타루치아 항과 마주 놓인 작은 섬에 다리를 건너 들어가야 닿게 되는 달걀성은, 12세기 노르만 족에 의해 세워진 요새이다. 마치 바다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곳에서는, 시드니, 리우데 자네이루와 더불어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인 나폴리의 전경이 생생하게 보인다. 한때 감옥으로도 사용된 곳이기에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한 켠엔 현대 미술관 구실을 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서 눈요기하기에 좋다. 항구를 따라 바람을 가르며 우리는 걸었다. 왕궁,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 바르세이유 궁을 본딴 왕궁(지금은 국립도서관), 조수미가 공연한 산 까를로 가극장이 빙 둘러싼 플레비시토 광장에서 사진을 찍은 후, 자유 시간을 가졌다. 다리가 아픈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까스텔 누오보까지 종종 걸음으로 걸었다. 왕궁이자 요새인 그 곳은 프랑스 앙주 가문의 카를레스 1세가 세운 곳인데 현재 시립박물관과 시 의회실로 사용되고 있다. (조토의 그림도 소장하고 있다) 움베르토 1세 갤러리아 부근에서 피자를 사 먹었다. 피자의 고향이 나폴리 아니던가. 다른 도시에 비해 훨씬 싼 가격에 크기도 더 큰 마르게리따 피자를 베어 물었다. 한두 가지의 스프레드 외엔 별다른 토핑이 없는 피자인데도 파삭파삭한 빵이 너무 맛있었다. 피자의 원조답다!  산타루치아 항에서 카프리 관광 팀과 다시 만났다. 이산가족이 재회한 것처럼. 로마의 마지막 밤, 아쉬운 맘으로 삼삼오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리도 한참  걸어다니다가 돌아와 라운지의 바를 찾았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로마와 폼페이, 쏘렌토, 나폴리를 마음깊이 심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버스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인솔자가 말했다. 버스인지 내 몸인지 모를 만큼 밀착되어야 한다기에, 워낙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네 시간이나 달리는 동안, 우리들의 상냥한 인솔자는 영화 ‘로마의 휴일’을 틀어주었고, 우리는 다시금 로마의 곳곳을 영상으로 보면서, 어느새 한 순간의 추억으로 자리매김한 로마를 그리워하며, 오드리 헵번의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과 더불어 애달피 여기고 있었다. 피사로 가는 사이,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대학으로 유명한 볼로냐,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장인 베로나가 살짝살짝 엿보였다.

  사이프러스(서양 측백) 나무가 즐비한 피사에 도착했다. 고흐의 그림에 그렇게나 많이 등장하는 나무, 그 나무들 사이로 피사의 사탑이 수줍은 색시처럼 뽀오얀 알몸을 드러내어 보였다. 피사 대학 교수였던 갈릴레이가 진자의 원리를 발견한 두오모, 니콜라 피사노, 조반니 피사노 부자가 장식한 세례당이 사탑 옆에 친구처럼 늘어서 있었다.  지반이 약한 바람에 자꾸 기울어지는 피사의 사탑 덕분에 관광객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가 보다. 새파란 잔디밭 옆에 정갈하게 나란히 세워진 뽀오얀 건물들 앞에서 사람들마다 손을 들어 사탑을 밀어보는 시늉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 손으로 밀면 그대로 밀려나는 탑인 것처럼. 사탑 주위엔 전우치처럼 복제된 피노키오들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Souvenir 가게마다 갖가지 형태의 피노키오들이 우리를 반기니까. 제페토 영감님은 도대체 어디에 가셨을까? 사탑과 사이프러스나무가 너무도 인상적인 피사를 벗어나 밀라노로 향했다.

  무려 네 시간을 달려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 밀라노에 이르렀다. 한때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도 해서 그런지, 남부 이탈리아와는 판이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평균 키가 눈에 띄게 커지고, 옷차림이 엄청나게 화려해지고 풍요로워 보였다. 할머니들까지 밍크 코트로 몸을 휘감고 다녔다. 첨단 패션의 도시라더니, 과연 그 이름이 실감날 만큼 멋쟁이들이 많았다. 남쪽에 비해 소득이 3배를 넘는다고 한다. (6만 5천 달러 정도?) 밀라노 두오모는 사진으로 차갑게 보이던 것과는 달리,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퐁퐁 풍기고 있었다. 애써 꾸미지 않아도 절로 멋이 배어나오는 자태라고나 할까.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스페인의 세빌리아 대성당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마침 주현절 저녁 미사가 공개되고 있었다. 열 명도 넘는 사제들이 제단에 나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유려한 멜로디의 언어로 미사를 집전했다. 그 다음엔 하얀 복장의 어린 소년들이 제단 아래 임시 무대에서 흥겨운 노래에 맞춰 춤추는 광경이, 곳곳의 CCTV로 중계되고 있었다.

  흰색과 연분홍색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135개의 첨탑이 얹힌 꼭대기엔 밀라노의 수호신, 황금빛 마리아상이 도시를 굽어 살피고 있다. 고딕 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두오모의 곳곳을 렌즈에 담고 라 스칼라 극장으로 갔다. 극장 앞 광장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많은 세월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했으며 ‘최후의 만찬’을 그린 산타 마리아 델 그라치에 성당이 있는 도시답게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권위있는 라 스칼라 극장에선 살리에리, 푸치니, 베르디의 오페라가 상연되었으며, 아무나 감히 서지 못하는 그 무대에서 우리의 조수미가 공연을 했다는 사실, 너무나 자랑스럽다. 극장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가 하나하나 천천히 은은한 불빛으로 건물을 채워가는 레이저 쇼가 눈길을 끌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내부의 천정은 신비한 청보랏빛 불빛을 내뿜고 있고, 아래의 바닥엔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현대 자동차 i20(우리나라에선 i30)의 눈에 띄는 광고판이 세워진 두오모 광장이든, 스포르차 가문의 요새였던 스포르체스코 성이든, 거리의 작은 가게이든 간에 부유한 도시의 맛이 풍겨서, 고대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로마와 너무나 다르다.


  새벽부터 위태로운 눈길을 달린 버스는 스위스 국경을 넘었다. 알프스 아래의 고즈넉한 도시, 인터라켄(호수 사이)에 내린 우리는 점심 식사 후 인터라켄 동역에서 산악열차를 탔다. 장난감같이 귀여운 열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해발 3,454미터에 달하는 융프라우 요흐를 목적지로 삼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탔던지, 검표하는 아저씨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미소를 날렸다. 할 일이 끝난 그가 우리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을 좋아한다. 가 본 적은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한국인 친구가 많기 때문이란다. 어떻게? ‘날마다 많은 친구들이 한국에서 온다.’ 실컷 웃었다. 즐겁게 일하는 그의 모습이 참 소탈하고 정겨웠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풍경들, 아까운 그림들이 많았다. 천연 눈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스키어들, 6개월이나 되었을까 싶은 갓난쟁이를 눈썰매에 태워 눈길을 지쳐 내려가는 사람, 몸에 딱 붙는 복장의 산악인들, 나무 울타리가 둘러진 산꼭대기의 집들, 태양광 에너지를 얻기 위한 시설물 등등. 마침내 융프라우 요흐에 닿아 얼음궁전으로 걸어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일종의 고산병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메스꺼우며 기분이 묘한 상태로 쓰러질 것 같아 괴로웠다. 8848미터인 에베레스트에 산소통도 짊어지지 않고서 등정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미칠 것 같았다. 어떤 꼬마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죽는 시늉을 했다. ‘저는 10년밖에 살지 않았는데 오늘 여기에서 죽는 거예요?’ 알프스의 3자매봉 아이거, 메니히, 융프라우를 코 앞에서 바라보는데도, 지독한 현기증 때문에 감격을 잊을 정도였다. 겨우겨우 사진을 찍었다. 융 프라우를 결코 잊지 못하리라. 

  우리는 컵라면 공화국의 시민인가?  사람들이 주섬주섬 컵라면을 꺼냈다. 전망대에서 4유로와 뜨거운 물을 맞바꿔 라면을 먹었다. 그 곳에서 라면까지 사 먹으려면 10유로.(왕바가지) 어쨌든 뜨거운 국물로 속을 채우니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그런데 기압 차이로 인해 비닐 봉지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1회용 커피 봉지, 화장품 용기, 과자 봉지, 플라스틱 그릇까지……. 재미있는 체험 시간이었다. 걸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어지러워지는 몸을 가누기 어려워 난감해하며 내려가는 산악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산병 증세가 사라졌다. 다행이다. 두 번이나 갈아타고 무사히 돌아온 인터라켄 동역, 가까운 호텔에 몸을 뉘었다.


  새벽 5시에 짐을 꾸려 나왔다. 유로 레일을 타고 프랑스로 들어가는 날이다. 프랑스의 물루즈 역에서 파리 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크로와상을 사 먹었다. 소문대로 프랑스빵은 촉촉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었다. 좌석 번호가 무질서하게 붙어있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유로 레일에 올라타고 두 시간 여 달렸을까, 파리 동역에 닿았다. 파리지앤들은 어떨까 궁금했더랬는데 그냥 조금 멋스러운 사람들 같다. 이젠 ‘봉주르’ ‘맥시’ 를 익혀 사용해야 한다. 발음과 억양이 흥미로웠다. 모나코를 포함해 프랑스에서 18년째 살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 김기현님이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해외생활, 유학 생활, 국제결혼의 장단점, 중심 잡힌 가치관을 강조하는 그의 개념 있는 강의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베르사이유는 ‘벡사이’,  마르세이유는 ‘맑세이’ 등 현지 발음과 다른 것이었다. 열심히 발음 연습을 해봤다. 프랑스 대혁명의 영예와 아픔이 공존한 콩코드 광장, 오벨리스크를 보며 2킬로미터나 이어진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나폴레옹 개선문으로 갔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 비하여 거대하고 매끈한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역사나 전통의 숨결이 그다지 호소력있게 와 닿지는 않았다. 까마득히 오래 묵은 것을 미리 보고 와서일까? 코가 베이는 듯한 추위에 달달 떨면서 지하도를 건너 개선문 바로 아래까지 가서 이리저리 돌아가며 살펴보았다. 기둥 안쪽에 새겨진 장수들의 이름, 자유를 부르짖으며 거침없이 싸운 사람들을 새긴 부조, 외곽의 라데팡스 지구, 그리고 프랑스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샤를르 드골’ 거리 표지판까지. ‘샤를르 드 골 에뜨왈(별)광장’에서 별처럼 12군데로 뻗은 도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이상 기후에 힘입어 불어닥치는 바람이 어찌나 거세던지!

   베르사이유를 찾았다. 그 곳은 부르봉 왕가의 영광, 태양왕 루이 14세의 궁전이었다. 원래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이었던 곳을 궁전으로 증축하고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한다. Sortie라는 출입구 표시만 유심히 살피며 건성으로 보고 다녔다. 길다란 벽면 전체에 거울로 도배된 ‘거울의 방’, 루이 14세의 집무실, 접견실, 침실, 중국 비단이 수놓인 벽과 침대가 바로크 양식의 진수를 보이는 ‘왕비의 방’, 궁정 화가, 자끄 루이 다비드의 그림(나폴레옹 대관식)이 걸린 방을 둘러보고, 2만 평에 달하는 정원으로 나갔다. 넓은 정원은 눈으로 뒤덮힌 설원의 이미지였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운 바람에 노출된 우리는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비엔나의 쉔부른 궁전이 벩사이 궁을 본떴다더니 정말 비슷한 구조이다.

  발을 동동 굴려가며 파리의 붉은 버스를 기다렸다. 에펠탑이 한 눈에 보이는 광장에 차를 세워주는 현지 가이드님의 센스에 감복하며, 이제 막 불이 켜지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철골 탑,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음날, 세느 강변에 ㄷ자로 세워진 루브르를 찾았다. 진눈깨비가 흩뿌려지는 날씨, 그렇지만 유리 피라미드와  프랑수와 1세의 동상은 멋있어 보이기만 했다. 출입구인 피라미드 아래로 들어가서 관람 준비를 했다. 37만 점에 이르는 소장 작품을 어떻게 한꺼번에 다 보냐구? 우리는 미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눈에 익혀 왔더랬기에 꼭 봐야 할, 보고 싶은 작품들을 찾아 나서는 모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먼저 드농관을 달리며 훑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 -모나리자-는 먼 거리에서 보도록 되어있었는데,  과연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 나폴레옹 대관식, 레까미르 부인, 라파엘로의 성 모자 그림, 보티첼리의 그림, 군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 드라끌르와의 그림들을 찾아서 본 후, 다리가 아프도록 달렸다. 쉴리관에서 이집트 유물들을 보았다. 미이라, 유명한 서기 조각, 함무라비 법전 등, 약탈해 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의 직지심경을 아직 돌려주지 않은 나라가 프랑스이니만큼 오죽할까 싶었다. 문화의 대국에서 하는 짓이 이런 것일까? 가져가면 그만, 자기네 유물로 착각하고 있는 그들의 뻔뻔함이랄지, 아니면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랄지 구분 짓기 어려워진다.

  프랑스의 특식 전채 요리, 에스까르고(달팽이)를 여섯 개씩 먹었다. 초록빛 올리브유로 버무린 달팽이가 꽤 쫄깃쫄깃 혀에 감겨왔다. 남은 올리브유를 빵에 발라먹은 후, 스테이크를 먹고 푸딩으로 마무리했다. 오후엔 몽 마르뜨르와 노틀담 성당을 찾는 일정이 이어진다. 파리에서 찾아보기 드물다는 언덕, 몽 마르뜨르엔 또 하나의 성당(예수성심성당)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가파른 계단을 무수히 올라가니 언덕 아래 시가지가 파노라마 사진처럼 보였다. 눈 아래 펼쳐진 파리가 참 예쁘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성당 옆으로 연결된 골목을 돌아나가니 화가들의 거리가 나타났다. 아마추어 화가들이 초상화나 풍경화를 그리며 저마다의 재능을 뽐내는 거리, 자유롭고 낭만적인 거리 한 모퉁이엔 오페라 ‘라 보엠’의 배경이 된 곳도 있고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었다는 성당도 보인다. 쟝발장이 은촛대를 훔쳤던 작은 성당 문을 밀고 들어가 보았다. 아주 소박한 곳이었다. 코제뜨와 신부님, 장 발장의 목소리가 들려나오는 듯했다.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어깨 너머로 보다가 낭만의 몽마르뜨 언덕을 돌아나왔다.

  광장의 스케이트장이 인상적인 시청을 지나 세느강 건너 노틀 담 성당으로 갔다. 고딕 양식의 절정이라는 평대로, 뾰족한 탑을 이고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성당 외관 못지않게 내부도 굉장히 멋있었다. 유니세프 기금 마련에 동참하라는 글귀가 적힌 모금함에 동전 몇 닢을 넣고 노 수녀님으로부터 ‘맥시’ 소리를 돌려받으니 머리가 맑아졌다. 성당 앞 광장의 살찐 비둘기는 빵조각을 노리며 사람들에게 잽싸게 몰려들었다. 시테 섬의 시테 지구라더니, 파리 중심인 ZERO 가 새겨진 광장 바닥이 보였다. 서울까지 8991 킬로미터라는 설명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세느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퐁 뇌프가 건너다 보이는 곳에서. 호화로운 천정이 두드러져 보이는 라파예뜨 백화점에서 쇼핑 기회를 가졌다. 흘러내리는 듯한 백보랏빛 조명이 가로수마다 드리워진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호텔로 들어왔다. 에펠 탑 야경을 보고 세느강 유람선을 탈 사람들과 분리된 채.

 

  새벽 3시에 일어나 유로 스타를 탈 파리 북역으로 서둘러 갔다. 우리에게 파리란 도시는 엄청나게 추운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유로 스타를 기다리는 동안 역 청사에서도 벌벌 떨 정도였으니까.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들어 기차를 기다렸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도버 해협, 그 바다 속을 뚫은 터널을 통과하여 기차가 다닌다는데, 정말 신기한 세상, 대단한 사람들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곳이기에 공항처럼 출입국 심사를 받고 검색대에 짐을 올렸다. 그 와중에 귀중한 카메라를 잃어버린 3남매가 있었다. 울면서 아픔을 토로한 어린 삼남매가 마음에 걸렸다. 잃어버린 사진들이 얼마나 아까울까? 언젠가 다시 와야겠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진 않았다. ‘액땜한 셈 쳐라’, ‘몸 다치지 않고 여권 잃어버리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라.’ 등 갖은 말로 달랬지만 그들의 귀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타게 된 유로 스타는 쾌적하고 안락했다. 바로 옆 칸의 레스토랑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마시며 창밖을 구경하기도 했다. 언제 어느 틈에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는지 눈치채지 못할 즈음, 기차는 런던의 동화에 나올 것 같은 해리 포터 역에 도착해 버렸다. 런던 신사처럼 트렌치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런던 가이드님(백원종?)이 마중나와 있었다. 런던의 상징물 중심으로 보러다니는 일정 가운데, 제일 먼저 타워 브릿지로 갔다. 템즈 강에 가로놓여 열렸다 닫혔다 하는 다리, 그 옆엔 초현대식 번데기모양의 시청사가 있었다. 런던엔 옛것과 요즘 것이 공존하는 양상이 흔하다고 한다. 거대한 위엄을 자랑하는 국회의사당과 그에 딸린 시계탑 ‘빅벤’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터뜨렸다. 런던 주재 기자들이 현지 소식을 보도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이 열리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을 보고나서, 왕의 거처인 버킹엄 궁전을 찍고 나왔다. 우리 눈엔 참 소탈한 궁전이었다. 근위병들의 움직임을 담장의 창살 너머로 엿보고, 궁전과 마주보고 있는 빅토리아 1세 여왕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가장 부강했던 시절의 빅토리아 여왕,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은 덧없이 사라져간 좋았던 시절의 추억으로 기억될 뿐이겠지.

  이번 유럽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샐러드, 빵, 스테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피카딜리 광장 주변의 오페라 극장들을 지나 미츠코시 백화점의 쇼핑 시간이 주어졌다. 사람들이 가장 붐빈 곳은 버버리 매장이었다. 차, 기념품 등을 사 넣었다. 런던 시민에게 가장 인기 있는 녹지 공간, 100만 평이나 되는 하이드 파크에 내렸다. 넓디넓은 숲 사이로 건강을 다지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곳 깊숙한 곳엔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공간, ‘ORATOR's CORNER’가 있다. 아무나 어떤 말이든지 자유롭게 외쳐도 되는 연단이 마련되어 있는 공간. 언론의 자유가 절실히 느껴지는 요즘, 의미심장하게 여겨지는 곳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관광 코스는, 대영박물관이었다.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빼앗아 오거나 훔쳐 온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데, 우리는 주로 그리스, 이집트, 앗시리아인들의 유물을 보았다. 로제타석, 람세스 2세의 초상, 화려한 관에 들어있는 미이라들, 파르테논 신전 모형 등, 정말 멋진 고대의 유물들을 보며 설명을 들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영국인들이 약탈해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유물들은 벌써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정녕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대영박물관의 곳간을 다른 나라의 약탈물들로 그득하게 채워둔 것일까? 한국의 도자기 전시관도 보였지만 비행기 시각에 쫓긴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좌석을 배정받고 짐을 부쳤다. 샐러드와 빵을 먹으며 한국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임을 체감하게 되었다. 종류는 또 얼마나 다양한가?! 돌아가면 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아삭아삭한 김치, 매콤달콤한 떡볶이, 얼큰한 해물탕, 구수한 된장찌개, 미역국……. 공항 마트에서 사탕과 콜라를 샀다. 영어가 통하는 곳이고 곳곳의 설명문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언어의 힘 또한 엄청난 것이구나,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구텐 나흐트’, ‘구텐 모르겐’, ‘단케’에서 시작된 유럽 여행, ‘본 조르노’, ‘보나 세라’, ‘보나 노테’, ‘그라치에’, ‘프론토’를 거쳐 ‘봉 줄’, ‘맥시’, ‘보나뻬띠’에서 다시 ‘굿 이브닝’으로 인사말이 바뀌었다. 11시간의 비행을 마치면 우리의 모국어, 맛있는 우리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덕분에 즐거웠어요.’ ‘수고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며 우리는 헤어져갈 것이다. 친절 그 자체였던 인솔자 순수남 강영진님, 12일간 함께 여행한 일행 여러분들께 행운이 깃들길 바라마지 않는다. 어쩌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어 올랐다가,

  어느덧 다섯 번째 타고 날아다닌 노랑풍선, 다시 탈 기회가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

(유럽으로 들어가던 비행기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스위스 아줌마, 실비아에게 사진과 편지를 보내줘야 하는데, 시차 적응이 덜 된 내 손은 아직껏 사진함에 미칠 여력이 없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딸이 공부하고 있는 한국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고 한국 음식이 건강식이라며 기내에서도 한식만 고집하던 국제적인 그녀, 그녀의 파란 눈이 자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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