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쯤이야
대본/ 연출 이권주

등장인물: A(김명자),
B(윤진희),
C(신동선),
D(조은아),
E(이권주),
F(최두영),
G(이진숙) 등 7명
암전 상태에서 잔잔한 음악(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흐르다가 조명이 켜지면 남녀 2명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먼저 여인이 천천히 무대 앞으로 나오면서 시낭송을 한다. 남자는 조용히 듣고 있다.
D: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E: (여인을 보면서) 시가 아주 좋습니다.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란 놈이 연상되네요.
D: 제가 주관했던 행사에서 장애인 학생이 낭송했던 시인데요, 너무 좋아서 다시 낭송해 본 겁니다.
E: 행사를 주관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D: 새롭게 도전하는 장애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E: 훌륭하십니다.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D: 감동과 눈물겨움 그 자체였지요. 삶의 희망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느낌이었어요.
E: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선생님께서 지도하셨고 발표 기회를 주셨던 보람이 컸을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힘들게 살면서 좋은 일을 참 많이 해 오셨던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D: (겸손하게) 아~뇨. 힘들었겠다 말씀하시지만 저는 아이들 덕분에 아주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환하게 웃는다)
E: 선생님의 환한 얼굴만 봐도 그렇게 느껴져요. 특별한 바람이나 소원이 있으신가요?
D: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사는 사회가 빨리 오면 좋겠고요, 공의 탄력성만큼이나 우리 장애인들이 활력 넘치고 행복하면 참 좋겠습니다.
E: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꼭 필요한 것이겠지요?
D: 그렇다고 장애인들을 너무 동정하거나 그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들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열정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E: 선생님, 힘내시구요,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해 주시길 바랄게요. 다음 기회에 또 뵙겠습니다.(D,E 서로 인사하면서 D는 무대 왼쪽으로 퇴장하고, E는 무대중앙으로 이동하면서 관객석을 향하여) 안녕하세요? 삶을 노래한 시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과 그 분위기에 젖어보는 오늘입니다. 시에 녹아있는 감동의 조각들을 잘 감상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저희들과 함께하기를 기대합니다. (부채를 폈다가 접으며) 여러분, 시조창이 어떤 것인지 아시죠? 시조를 창으로 표현하는 거. 창, 노래부를 창, 다시 말해 시조를 노래로 표현하는 예술인 거죠. 그런데 전국적으로 이거 제대로 하시는 분 많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자리에 그 시조창을 멋지게 하는 분이 계셔서 모실까 하는데 괜찮겠지요? (무대쪽을 향하여) 김명자 선생님,(소개와 함께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오면) 예, 나오고 계십니다. 박수 좀 보내주시죠. 감사합니다. 그리고요, 시조창과 잘 어울리는 고전무용을 곁들이면 좋겠다 싶어서 무용애호가이신 이진숙 선생님도 잠시 뒤에 모실까 합니다. 두 분께서 준비하는 동안 제가 먼저 여러분께 시 한 수를 낭송해 올리겠습니다. (음악 흐르고 김명자 선생님과 이진숙 선생님은 북을 들고 등장하여 무대의 오른쪽에 앉아 대기한다. 언제든지 시조창을 부를 자세다. E가 자연스레 김영랑의 ‘북’이란 시를 낭송한다. 음악은 <물 속의 달 그림자>)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때리면 만갑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콘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듸 잔가락은 온통 잊으오/ 떡-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곧바로 퇴장하면서 잠시 뒤에 음악이 멈추고, 또 다른 음악 이어진다.)
A: (한시 부분을 음악과 함께 낭송하고 끝난 뒤에는 무대의 앞쪽에 둔 북을 가까이 한 뒤 앉아서 작자미상의 엇지조 초장을 시조창으로 노래한다.)
달을 대하여 집을 생각하며(對月思家) - 김호연재
초당에 물 떨어지는 소리 쇠잔하고/ 주렴 밖 둥근 달 높이 솟아있네/ 시름 많은 사람 잠들지 못하고/ 쓸쓸히 맑은 밤에 앉아있도다/ 처량한 나뭇잎엔 이슬이 맺히고/ 샘물 소리 목메어 우는 듯하구나./ 서늘한 바람 나의 옷 파고들고/ 은하수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네/ 이별의 정 막을 길 없으니/ 달을 마주하여 부질없이 마음만 아프지/ 남북으로 흩어있는 형제 생각하노니/ 하늘가에 외로운 신세 되었어라/ 봄 기러기들은 다 돌아가고/ 편지는 부탁할 데 없구나./ 한번 읊고 또 한번 탄식하나니/ 눈물이 절로 뚝뚝 떨어짐이여//
달 밝고 서리 친 밤 울고가는 저 기러기야
소상동정 어데 두고 여관 한등 잠든 나를 깨우느냐
밤중만 네 울음 한 소리에 잠못 이뤄 하노라.
(작자미상, 엇시조)
한시 낭송과 시조창이 진행하는 동안 G여인이 등장하여 무용을 가미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시조창이 끝나면 무용도 자연스레 마무리를 하고 그 시조창의 내용과 분위기에 걸맞는 시조를 낭송한다. 이 때 사용하는 음악은 앞의 음악과 동일한 것으로 하여 앞의 분위기를 이어가거나 음악을 생략하고 낭송해도 좋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무제1' 전문, 이영도 시조)
시조의 향연이 차분하게 진행되는 동안 무대 반대편에서 두 여인(B, C)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조명 들어오면 대사를 시작한다.
B: 김명자 선생님의 시조창은(엄지척을 하면서) 참말로 최고여. 좀처럼 듣기 힘들고 귀한 겨.
C: 이진숙 선생님의 춤이 또 얼마나 우아하고 멋집니까? 시조 낭송은 물론이고요. 근데, 오늘 두 분의 낭송을 들어보니까 내용이 너무 슬퍼요.
B: (일어서면서)이별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임 때문에 뒤숭숭한 여인의 마음, 누가 알아주기나 하겠어? 슬피 운다고 뭐가 해결되겠냐구? (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럴수록 강해져야지.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용기가 필요한 겨. (힐끗 보면서) 내 말이 맞제?
C: 그래요, 언니나 저나 참 어렵게 살아오긴 했지만 특유의 강인함으로 잘 헤쳐왔다 아닙니까. 웬만한 어려움은 까짓거 한주먹거리도 안돼요.
B: 한 주먹거리?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강한 여인같네~에.(자리에 앉는다) 평소의 동생 이미지가 아니여.
C: 그래요? 늘 제 방식대로 살아 왔던 것은 맞아요. (미소지으며 B에게 다가가 목, 어깨 부분을 두 손으로 만져주면서) 그래도 아이들 덕분에 참 즐겁게 살았어요. 요즘 제가 만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지. 그 아이들에 대한 간절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요.
B: 동생, 지금 그 마음을 표현해 볼 수 있겠어?
C: 그 간절함을 담고 있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만, 언니가 좋아하는 마음의 시가 있다면 그 시를 먼저 듣고 싶은데요.(자리에 앉는다)
B: 내 마음의 시라? (미소를 띠면서) 그럼, 한번 들어 볼텐가?(일어서며 신석정의 ‘들길에 서서’란 시를 낭송한다. 음악은 시네마천국 주제곡, 엔리오 모리코네)
들길에 서서(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퇴장)
C: (천천히 일어나 관객을 향하며 박노해의 '아이야'란 시를 낭송한다. 음악은 제임스 라스트 Over Valley and Mountain 낭송 끝나면 들어왔던 방향으로 B는 퇴장하고 C는 무대 중앙으로 나와 박노해의 <아이야>를 낭송한다.
아이야(박노해)
아이는/ 온 우주를 한껏 머금은 장엄한 존재//아무도 모른다/ 이 아이가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고,/ 그 무엇이 되어 어디로 나아갈지// 지금 작고 갓난해도/ 영원으로부터 온 아이는/ 이미 다 가지고 여기 왔으니//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어주고,/ ‘뜨거운 믿음의 침묵’으로 눈물의 기도를 바칠 뿐이니// 아이야, 착하고 강하여라/ 사랑이 많고 지혜로워라/ 아름답고 생생하여라// 맘껏 뛰놀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네 삶을 망치는 것들과 싸워가라// 언제까지나 네 마음 깊은 곳에/ 하늘빛과 힘이 끊이지 않기를// 네가 여기 와주어 감사하다/ 사랑한다.(퇴장)
반대편 툇마루에 앉아서 여인네들의 대화와 시낭송을 지켜보던 두 남자, 조명 들어오면 대사가 잠시 진행된다.
F: 자네 말이야, 방금 두 분의 시낭송을 들으면서 뭔가 느끼는 것 없어?
E: 매력적인 분들이야. 전달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아주 분명하다구.
F: 그게 무엇일까?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야.
E: 현실의 어려움이야 언제든 이겨낼 수 있으니까 용기를 내라는 것, 아이들은 우주 같은 존재이니까 우리들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다시말해서 우리 어른들은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아이들은 더욱 사랑받아야 한다는 거지. 가슴이 따뜻해지고 있는 느낌이야. 기회가 되면 두 분과 만나서 막걸리나 한잔 하고 싶네.
F: 자네는 여전히 여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구만그려.
E: 허 이 사람 보게, 그거야 인지상정이지. 자네라고 다르겠어? (앉으면서) 그나저나,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F: (일어서면서) 잘 지내~애. 일복이 많은가 봐.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다는 거겠지?
E: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는 것도 괜찮지.
F: 성취감이나 만족감, 뭐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
E: 여하튼 자네의 무한한 능력은 알아줘야해. 훌륭하다구. 뭔가를 열심히 추구하면서 사는 것만큼 값진 게 있을까?
F: (사이) 그렇긴 하네만 갑자기 찾아오는 외로움은 나이가 들거나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더 깊어지는 것 같애.
(E는 F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F는 조용히 일어나 무대 중앙으로 나오면서 음악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또는 비제의 미뉴에트와 함께 신경림의 '갈대’를 낭송한다.)
갈대(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소리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퇴장)
시낭송이 끝나는 대로 F는 퇴장하고 E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서면서 김윤현의 시 ‘도배공 김씨’를 낭송한다. 음악은 오펜바하의 호프만의 뱃노래)
E: 도배공 김씨(김윤현)
모두가 벽을 만나면 돌아설 때/ 그는 벽을 찾아다닌다// 모두가 벽이 앞길을 막아선다고 할 때/ 그는 벽 앞에서 삶을 막아 낸다//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보다/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며// 모두가 벽을 만나 고개 숙일 때/ 그는 꽃무늬 든 벽지를 바르려 고개를 든다// 오래된 벽지처럼 빛바랜 삶의 언저리에 꽃무늬 넣으려/ 벽에 다가서 보는 것이다// 쑤시는 몸에 파스 바르듯/ 한 겹 한 겹 벽지를 날렵하게 바르며/ 허술해진 삶을 벽처럼 바로 세워 보려는 것이다// 풀 묻힌 솔로 자신의 키보다 더 긴 벽지 바르다 보면/ 벽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입에 풀이 부족했던 생을 막아보려는 그에게는 시작점이 되었다//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다가서는// 장미가 가시 사이에서 꽃을 피우듯/ 벽 사이에서 삶을 막아 내는 도배공 김 씨// 그는 우리들의 든든한 벽이다 (퇴장)
음악은 계속 흐르면서 암전되면, ‘이 정도쯤이야, 우린 다 해낼 수 있어요. 이 세상의 온갖 어려움 이겨내면서 살아요.’란 문구 컷과 ‘노래는 노래의 자리에서 평화롭게 불려지고, 시는 시의 자리에서 낭송되고 사랑받아야지요.’란 문구 컷이 자막으로 나타난다.
음악은 계속 흐르고 조명 밝아지면 7명의 등장인물 모두 나와 관객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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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시들은 시극과 주제면에서 연결되는 시 같아서 뽑은 것입니다.
1. 생명의 서(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유치환 시선 「생명의 서」(미래사, 1991년 1쇄, 1996년 10쇄) 중에서
2. 해바라기의 비명(함형수)
나의 무덮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3. 갈대(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소리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4. 여승(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5.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양성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6. 간(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7. 잔디처럼(김윤현)
눌러앉아 쉴 만큼 쉬다가원하면 밟고 지나가도 괜찮아
높은 곳을 목표로 두지 않았기에
낮게 사는 것도 불편하지는 않지
뒤쳐진다는 걱정도 하지 않지
그래선지 밤이면 별들도 내려와
함께하다가 새벽이 되면 돌아가지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낮을수록 아름답다 하면서도
정작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얘기만 하지
산다는 것이 잘해봐야 한 뼘 차
네 손 내밀면 내 젖은 손 내밀면서
사는 거야, 사소한 것의 소중함으로
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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