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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서후면 광흥사, 개목사 들르기

사진과 함께

by 우람별(논강) 2024. 4. 14.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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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서후면에 위치한 광흥사와 개목사에 들를 기회가 있어서 잠시 둘러보았다. 며칠 전 아내가 불현듯 자신의 고향에 있는 절인데도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이 있다며 같이 가 보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 또한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곳이라 아내의 제안에 적극 호응했고 오늘 휴일을 이용, 애마 산타페를 타고 안동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내려주는 드립 커피의 향은 늘 그렇듯이 나를 즐겁게 한다. 두 사찰(광흥사, 개목사)에 대한 기록은 아래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광흥사 도착 8킬로 전에 있는 예닮 식당에 들러서 안동간고등어 연밥(17,000원)을 주문해서 점심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먹는 간고등어의 맛은 특별했다. 된장찌개도 맛이 좋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던가!

 

식당 밖 데크 의자에 앉아 한참을 쉬다가 광흥사로 향했다. 

 

안동 광흥사(廣興寺)는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고려 중흥기를 거쳐 조선시대 왕실 원당(願堂)으로 번영을 누렸다. 왕실 원당 답게 광흥사는 500여칸에 이르는, 안동지방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 속 암자처럼 아담하다. 1827년 큰 화재로 5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이 소실 된 뒤 전쟁의 참화가 겹쳐 번성했던 당시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찰이 만만치 않은 사세를 자랑하는 고찰임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재판을 받았던 배모씨는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해례본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적반하장격으로 정부를 상대로 1000억원을 요구하며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국민들 속을 태우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중요한 이유는 오직 이 책에서만 한글 원리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광흥사에서 도난당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발행된 훈민정음 해설서로 국보 제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일한 판본이다.

광흥사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 어첩(御帖)과 유물(遺物) 및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로 적은 많은 불교 경전을 간직했다. 세조는 법화 화엄 등 경전을 간행하여 봉안케 했으며 세종의 친서(親書) 수사금자법화경(手寫金子法華經), 영조의 친서 대병풍(大屛風), 어필족자(御筆簇子) 등 많은 보물이 광흥사에서 나왔다. 학조(學祖, 1431~1591)대사가 그 중심에 서있다. 그리고 잊혀진 고승과 광흥사를 현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이 이끌어냈다.

학조대사는 조선 초기 인물이다. 1431년 태어난 학조대사는 13세 때 광흥사 산내 암자 애련사로 출가했다. 신미대사가 스승이다. 학조를 본 신미대사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채고 발바닥을 보니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고승이다. 역사는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집필했다고 기록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님이 최근 연구 결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집현전 학자들은 오히려 화장실에 앉아서 자음 모음을 맞추어 글을 다 익힐 수 있는 아주 쉬운 글이라며 ‘통시글’이라고 멸시했다. 훈민정음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문자다. 신미대사는 산스크리트어 전문가였다. 불교 경전을 기록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주역이라면 신미의 제자 학조와 세종의 아들 수양은 훈민정음을 대중화하고 널리 퍼뜨린 인물이다. 학조는 세조의 왕사였다. 조선 중기에 보우대사가 있었다면 초기에는 학조대사가 있었다. 광흥사가 왕실 원당으로 수많은 왕실 보물을 간직한 연유도 학조대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가섭존자 입상, 소조삼존불, 아난존자입상과 좌,우 뒤편으로 16나한이 자리하고있다.

 

광흥사는 훈민정음의 보급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때까지 광흥사에 훈민정음 목판이 남아 있을 정도로 광흥사는 한글과 밀접하다. 간송미술관과 광흥사에서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그 목판으로 인쇄했다. 목판은 그러나 전쟁 중 소실됐다. 

묻혀있던 광흥사와 훈민정음 학조대사 인연은 광흥사 주지로 부임한 범종스님의 노력에 의해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나왔다. 스님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광흥사에서 훔쳤다는 서씨의 재판 증언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재판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언론에서는 서씨가 대웅전에서 훔쳤다고 했지만 검찰 조서에는 명부전 시왕상이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범종스님은 달랐다. 절도범이 털지 않은 다른 시왕상 복장에도 훈민정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화재 전문가를 불렀다. 

스님의 생각은 적중했다. 비록 훈민정음은 나오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 한글로 적은 수많은 불경이 들어 있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 간행된 고문헌이 다수 발견됐는데 그 중 <월인석보>와 <선종영가집언해> 등은 훈민정음 창제 초쇄본으로 추정하는 보물이었다. 

범종스님은 학조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한글 홍보에 적극 나섰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불교 교리를 담아 그림으로 그렸다. 발음기호, 한글에 담긴 뜻을 도상(圖上)으로 표현한 ‘훈민정음도’는 범종스님의 창작품이다. 스님은 훈민정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훈민(訓民)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이며 정음(正音)은 상구보리(上求菩提)다. 불교의 가르침과 한글 창제 의미가 같은 것이다.” 

스님의 한글 사랑과 보급 열정이 훈민정음에 10년간 매달렸던 영화감독과 만났으니 2018년 7월24일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다. 영화는 세종과 신미스님이 만나 백성을 위해 뜻을 모아 나라 글자를 만드는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았다. 범종스님이 연구한 훈민정음 신미 학조대사 이야기가 고스란히 영화에 담겼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광흥사를 둘러보고 개목사로 향했다. 

개목사로 오르는 1킬로미터 남짓되는 길이 워낙 가풀막져서 아내는 두 번 다시 오기는 쉽지 않겠다고 한다. 운전에 자신이 없어서 보이는 반응이겠지만 나는 스릴이 있어서 좋았다. 해발고도는 어느 정도인지 싶어 살펴보니 아래와 같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 절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흥국사(興國寺)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에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뒤, 맹인이 많은 안동 지방에서 더 이상 맹인이 생기지 않도록 절의 이름을 개목사로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

건물은 전툇간 5량(前退間五樑) 구조인데, 앞면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만, 옆면은 앞쪽에 1칸의 툇간을 덧붙여 마치 유교건물인 대성전(大成殿)처럼보인다. 이전에는 가운데칸인 정간(正間)만 법당이었고, 좌우의 협간(夾間)은 돌방이었으며, 건물 서쪽에는 1칸반 규모의 부엌이 덧대어 있었다. 1969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방과 부엌을 모두 없앤 법당으로 바꾸었다.

건물은 막돌 위에 긴 돌을 쌓은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 윗면에는 둥글고 넓적한 자연석을 다듬지 않은 채 주춧돌로 놓았다. 가구(架構)는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둔 주심포(柱心包)식으로 결구(結構)되었다. 곧 기둥은 배흘림이 매우 약한 둥근 기둥인데, 앞면 평주(平柱)의 머리 부분에는 툇보[退樑]가 연결되었고, 대접받침인 주두(柱頭) 위에는 쇠서[牛舌]를 놓아 대들보[大樑]를 받치도록 하였다. 뒷면의 공포는 앞면의 공포와 달리 평주 중간쯤에 창방(昌枋)과 ‘십(十)’자형으로 교차되게 짠 짧은 살미[山彌]인 헛첨차를 두고서, 그 위에 이제공(二諸工)을 놓았는데, 초제공(初諸工)은 운두가 높은 살미로 되어 특이하다. 이제공은 행공첨차(行工檐遮)와 함께 짜여져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고 있으며, 쇠서는 모두 끝부분이 아래로 처진 수서[垂舌]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조각이 선명하지 못한 보아지[樑奉]로 대들보를 받치게 하였는데, 대들보 위에는 포작(包作) 모양으로 세운 기둥인 포대공(包臺工)과 함께 휨이 적은 특이한 모양의 솟을합장(合掌)을 놓아서 종보[宗樑]와 중도리(中道里)를 받치게 하였다.

툇기둥[退柱]의 맨 윗부분에는 대접받침인 주두를 놓아서, 평주와 툇기둥을 연결하는 툇보,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도록 하였다. 도리 방향에는 창방을 생략한 대신 기둥 머리에 다포(多包)계 건물에서 주로 사용하는 둥근 모양의 첨차를 끼워서 주심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게 하였다. 툇기둥의 머리 부분은 쇠서로 처리되었다.

앞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정(井)’자 모양의 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정간은 4분합(四分閤)이고 좌우 협간은 2분합이다. 나머지 3면은 뒷면 북쪽 협간에 1짝의 정자살문이 달린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벽으로 처리되었다. 툇간의 바닥과 건물 안의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건물 안의 가운데칸 뒷쪽에는 작은 불단(佛壇)이 마련되어 있는데, 불단 위에는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고, 뒤쪽의 후불벽에는 석가모니불을 그린 탱화가 걸려 있으며, 보살좌상 위에는 간략한 모습의 닫집이 설치되었다. 맞배지붕의 양쪽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서 풍판(風板)을 달아 놓았다.

이 건물은 1969년에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천순원년(天順元年)’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457년(세조 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변형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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