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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극 <선물같은 산등성이> 대본(2024 도서관 콘서트 대비)

구미낭송가협회 관련

by 우람별(논강) 2024. 4. 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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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같은 산등성이

 
연출, 각색 – 이권주
 

(잔잔한 음악이 흐르다가 조명이 점차 밝아지고..... 잠시 후, 두 남녀가 무대 가운데 나란히 앉아 자연스레 이야기를 시작한다.)
A: 동생, 그간 별일 없었지?
B: 예, 저야 잘 지내지요. 오빠는 꽤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떠셨어요?
A: 좋았어. 중국의 유명한 산들을 좀 돌아다녔지. 여하튼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었어.
B: 특별한 체험이라뇨?
A: 같이 갔던 친구들의 체력이 참 대단했는데, 나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거든.
B: (의아한 듯) 그게 뭐 특별한 것인가요? 당연한 것이지.
A: (웃으며) 알다시피 내가 워낙 체력이 떨어지잖아. 처음 여행 시작할 때부터 과연 따라다닐 수나 있을지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자신감 있게) 그런데 해 낸 거야.
B: (고개를 끄덕이며) 으음, 그러니까 이번 여행에서 큰 자신감을 얻으셨다 이 말씀이군요?
A: 그렇지. 수천수만 길의 절벽, 그 옆에 설치된 잔도 위를 수없이 지나다녔어. 오르락내리락 하늘을 걷고 있는 것 같았지. 무서웠지만 아주 환상적이었어. 지금껏 그런 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거든.
B: 늘 느끼지만 오빤 너무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하는 일도 많은데 등산까지. (사이)신경 쓰는 부분이 참 많겠다 싶어요.
A: 허허, 세상에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그리구 많은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니?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야.
B: 오빠의 관심영역은 끝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잔소리라 생각하지 말고 동생의 진심어린 걱정을 잘 받아주셨으면 해요.
A: 그래, 오빠를 걱정해 주는 내 동생이 최고야. (사이) 참, 우리 조카들 잘 지내고 있지?
B: 아들은 원하던 곳에 취업했구요. 막내딸도(미소를 띠며) 여전히 귀엽죠. 요즘은 자격증 따려고 열심이에요. 그런데 오빠와 잘 지내다가도 가끔씩 대들어서 난감할 때가 있어요. 나도 어느 편을 들지 어렵더라구요. 나중에도 우애있게 잘 지내야 할텐데.
A: 걱정하지 마. 남매지간에 같이 지내다 보면 티격태격 부딪힐 때가 있는 거지 뭐. 그리고 조카들이 다 착하잖아.
B: (고개를 끄덕이며) 하기야 부딪히는 거로 따진다면 우리 부모님만 할까요? 여전히 사랑싸움 하시느라 편한 날이 없어요.
A: 그건 틀림없어.(한숨을 쉬면서) 하루라도 불똥이 안 튀면 이상할 정도야. 난, 이제 말릴 생각도 안 한다.
B: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오셨는데 어떻게 말릴 수 있겠어요?
A: (사이, 분위기를 전환한다) 동생, 이렇게 좋은 날, 여기 오신 분들께 사랑의 메시지를 하나씩 전해 드리고 우리 부모님께서 한평생을 어떻게 사셨는지 살짝 보여드리는 게 어떨까?
B: (관객을 향하여) 그래도 될까요?
 
조명 꺼지면 B는 무대의 오른쪽에 서고,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면 A가 무대 왼쪽으로 가서 임길택의 <저녁 한 때>란 시를 낭송한다.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 할 힘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 난 진땀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 걸음으로 어둠길 가늠하셨겠지// 불 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한데 어울려/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A의 낭송이 끝나면 왼쪽 조명(스포트라이트) 어두워지고 B가 서 있는 자리에 조명(스포트라이트)이 서서히 밝아진다. B는 천천히 무대의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 이정록의 <의자>란 시를 낭송한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한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여//
 
A와 B의 낭송이 모두 끝나면 조명 꺼지고 종전의 음악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으로 바뀐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면서 고영민의 <산등성이>란 시를 회원 중의 한 분이 무대 뒤에서 직접 시낭송을 하고 중간중간 네 명(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의 배우가 각각의 위치에 앉아 극적인 요소를 최대한 살려 연기한다.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 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조명 IN)
(아버지)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가 없구먼.
이때까정 산 것도 나니께 살아준 거여~
<아버지가 나가면서 방문을 힘껏 걷어찬다.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난다.>
(조명 OUT)
 
아버지는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 나가는 칠흑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다며
갈 데까지 아주 멀리 가보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조명 IN)
(어머니)
그냥 냅 둬,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니 아부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아, 그래두 사낸디,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무시라도 짤라야 하는 거 아녀.
쫌시러운 영감탱이 같으니라구.
집을 나갈 거면 읍내까정이라두 갔다 와야지
산등성이가 뭐여. 산등성이가.
(조명 OUT)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모습,
잰걸음을 따라 나도 가만히 걷는다. 기세가 천 리를 갈 듯하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아버지)
에이, 이 못된 할망구야!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 평생을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할망구 같으니라구.
<어머니 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친다.>
(조명 OUT)
 
뒤돌아 씩씩거리며 아버지, 집으로 천릿길을 내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 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아들은 묻는다.
 
(조명 IN)
(아들)
아부지는 왜 저 산등성이 하나를 못 넘어유?
길이 험한 것도 아니고 산이 높은 것도 아닌디...
 
아버지는 답한다.
 
(아버지)
가장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그때는 집안이 망하고 마는 겨.
내가 진즉 산등성이를 넘었어 봐라. 이 시상에 니가 나왔겠냐? 안 그려?


딸이 묻는다.
(딸)
엄마는 대문 앞까지 전등불은 왜 켜 놔유?
요새 전기세가 얼마나 비싼디?
 
어머니가 답한다.
(어머니)
남정네가 대문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기다려주는 게 아낙이여.
아, 그깟 전기세가 대수다냐?
야, 니들 뭐하냐?
아부지 들어오시나 얼른 대문 앞에 나가 봐라~
 
아들 딸이 묻는다.
(아들과 딸)
그럴 걸 왜 싸워유?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야, 이눔들아. 물을 걸 물어!
60년 정이 그냥 쌓인 줄 알어?
이불속 정도 60년이지만
쌈박질 정도 60년이여~~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깨동무를 한다.
딸이 내동댕이 친 물건을 주어다 아버지에게 건넨다.>
 
(딸)
아부지, 담에 싸울 때 써야잖어유.
(아버지)
그려. 또 써야지.
물건 던지는 소리가 쨍하고 나면 속이 시원허지.
사랑은 역시 소리가 나야 제맛이여.
안 그려?
 
<아버지가 청중을 보고 묻는다. 대답소리가 적으면...>
(어머니)
아, 뭔 대답이 그리 시원찮어?
니들은 사랑 안 해봤어?
사랑해본 사람만 크게 대답혀 봐!
사랑은 역시 요강 깨지는 소리만큼은
요란하게 해야제
안 그려?
 
<어머니가 청중을 보고 웃는다.
하하하하하!
가족이 함께 웃는다. 청중도 따라 웃는다.
아들만 남고 세 가족은 조용히 퇴장한다.>
  
 
(어머니는 종종 똑 같은 말을 수백 번씩 하고도 처음 하사는 말처럼 진지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반복되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요. 마침내 서로 지지 않으려고 험악한 말다툼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자식들은 애가 타지요.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부모님의 사랑싸움이니 살아계심에 고마워 할 뿐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는데 자식들이 감히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 생략 가능)

(무대 바깥쪽을 보면서) 아버지, 어머니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저희들이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사랑싸움도 계속 하셔야 해요. (관객을 향하여) 우리 부모님의 살아가는 모습, 어떻게 보셨습니까? 부부는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울까요? 그 물음에 답하는 좋은 시가 하나 있어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사 끝나자마자 김광석의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음악이 흐르고 그 음악과 함께 함민복의 <부부>란 시를 차분하게 낭송한다.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시낭송 끝나자마자 조명 아웃, 김광석의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음악은 계속 이어진다. 음악 소리 점점 커지면서 조명 들어오면 배우들은 무대로 나와서 관객들께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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