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오랜만에 열호재를 찾았다. 점심 때 맛있는 국간장떡볶이스테이크를 만들어 주겠다며 음식재료를 준비해 왔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금요미식회에서 본 것을 실험적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다. 만드는 과정이 아주 간단했다.
떡볶이와 밥, 준비해 놓은 반찬으로 맛있게 점심 식사를 한 직후, 구미보 주변을 산책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율곡 이이의 동생 이우는 초서의 대가인 고산 황기로 선생의 사위다. 낙동강 보천탄 옆, 고아읍 예강리에 자그마한 매학정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그 정자를 소재로 5언율시의 한시로 그 멋스러움을 읊은 것이라 보여진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구미보 부근 자전거인증센터 관광안내판 부근에 조형물로 쓸쓸하게 서 있다.
송당 박영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선산읍 신기리 소재 송당정사를 찾았다.
명경당 오언절구의 한시를 해석하면, (유상비위유) 형상이 있다 하여 있는 게 아니고, (무형불시공) 형체가 없다 하여 없는 게 아니로다. (실중지시실) 진실과 적중해야 진실을 알게 될지니 (공외막심공) 스스로 쌓은 공외에 공을 찾지 마라.
1537년(중종 32)에 송당의 제자 박운(1493~1562)이 경상도 선산 해평면 고리실 자신의 집에 '수지명경'에서 뜻을 취하여 명경당을 지었다. 이를 기념하여 개최한 시회에 함께 박영과 이언적(1491~1553)은 함께 참석하여 공과 공자를 운자로 한 도학시를 주고받은 일화는 이들이 긴밀하게 교유하였음을 보여준다. (인터넷 자료 인용)
의술도 일가 이뤄…, 보호수 된 모과나무
신도비를 지나 송당정사 경내를 빠져나오는 길 왼쪽에 제법 예사롭지 않은 모양을 한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송당정사 모과나무’다. 이 나무는 송당이 심었는데, 굳이 모과를 선택한 것은 약재로 쓰일 수 있어서였다고 전한다. 모과는 기침과 감기, 구토 설사, 위장병 약재로 쓰이는 나무다.(인터넷 자료)
송당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정사는 간결하고 소박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앞줄에는 마루를 깔았고 뒷줄에는 온돌방 2칸과 마루 1칸을 이었는데, 앞줄 마루와 연결되어 ‘ㄱ자’형을 이룬다. 송당정사는 건물의 규모와 구성이 기술된, 흔치 않은 중건기(重建記)가 전해 오고 있어서 건축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다.(인터넷 자료임)
정사 오른쪽 노송 몇 그루 너머 낙동강이 흐르고 있고, 정사의 뒤쪽에는 사당인 문목사(文穆祠)를 두었다. 군데군데 노송이 숲을 이룬 언덕 이편에 미수(眉叟) 허목(1596~1682)이 비명(碑銘)을 쓴 박영의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신도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를 뜻하며,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 동남쪽에 세운 비석이다. 조선시대에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지닌 자만 세울 수 있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인터넷 자료임)
송당 박영(松堂 朴英 1471 ~ 1540)은 조선전기 강계부사, 동부승지, 내의원제조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이다.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박철손(朴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수종(朴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딸이다. 경북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 : 조선시대 정예 기병 중심의 친위병)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 :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관직)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大學)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같은 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소환돼서 임명되었으며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김억제(金億濟)의 모함으로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 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날 수 있었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의술에도 능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松堂集)·경험방(經驗方)·활인신방(活人新方)·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등이 있다.
송당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정사는 간결하고 소박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앞줄에는 마루를 깔았고 뒷줄에는 온돌방 2칸과 마루 1칸을 이었는데, 앞줄 마루와 연결되어 ‘ㄱ자’형을 이룬다. 송당정사는 건물의 규모와 구성이 기술된, 흔치 않은 중건기(重建記)가 전해 오고 있어서 건축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다.
송당정사 앞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다섯 색깔의 페이트로 칠을 해서 의자를 나란히 놓아두었는데 누굴까? 이곳을 관리하는 관리인? 여하튼 이곳을 찾아온 탐방객들이 잠시 앉아서 쉬어가도 좋다는 배려같아서 고맙다. 강렬한 원색이 눈에 자극적이긴 하나 한 번쯤 앉아서 머물다 가고 싶지 않을까 한다.
송당정사 옆쪽으로 밀양박씨 문중 묘원이 조성되어 있다. 최근 돌아가신 분은 윗줄 제일 왼쪽에 위치해 있는 조상의 13대 손임을 알 수 있다.
멀리 보이는 고속도로 바로 아래가 도개면에 소재한 신라불교초전지, 600년 전 고구려 승려 아도가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곳이다. 뒤로 보이는 산이 청화산과 그 바로 오른쪽 옆에 있는 냉산이 감싸는 대지 1만 1167평에 신라불교초전기념관, 전시가옥, 사찰음식체험관, 전통가옥체험관 등이 알차게 들어서 있다.
아내는 유난히 진홍빛 색깔에 대한 무서움이 있다. 빨강색 의자를 가리고 사진을 찍는 게 좋겠다고 해서 한 장 찍어 주었다.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세월이 갈수록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늘어가는 흰머리와 깊어지는 주름살은 어쩔 수가 없다. 늙음을 탄식한들 오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명혜당, 아직도 그대는 아름답소. 너무 상심치 마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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