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특별히 1979년 12월 12일의 역사적 기록을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 11월 20일에 개봉되어 닷새만에 150만 명을 돌파하는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이란 영화다. 구미 상권의 중심지에 소재한 롯데시네마, 가끔씩 관심있는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들렀던 곳이지만 지금껏 관객들이 자리를 꽉 메운 상태에서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다. 워낙 홍보가 잘 된 것인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잘 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너나 할 것 없이 오늘만큼은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듯, 영화관을 찾은 분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 영화 제목 '서울의 봄'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사이 벌어진 민주화 운동 시기를 가리키는 말임.)
영화는 처음부터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고,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2시간 10분이 흘러갔다. 전두환의 역할을 맡은 황정민과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소장의 역할을 맡은 정우성 두 배우가 특별히 돋보이는 영화였다. 그 외에도 이성민, 김성균, 박해준 등이 열연을 펼쳤다. 정해인, 이준혁, 정만식 등은 특별출연으로 힘을 보탰다. 영화에 등장하는 실제 주요 인물의 이름은 성은 그대로 살리고 이름은 살짝 바꿔놓아서 헷갈리기는 하지만 당시의 군 보직만큼은 그대로 살려서 전개되고 있었다. 소위 10.26 이후 실권을 장악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비롯하여 하나회 멤버들인 노태우, 정호용, 허화평 등 전두환의 추종자들 또는 몇 안 되는 중장급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쿠데타 세력들과 그들의 음모를 끝까지 막아내려는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헌병감 김진기 등의 목숨을 건 싸움을 긴장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잠시도 눈돌릴 겨를이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시간들이다.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하튼 김성주 감독의 치밀한 연출이 돋보였고, 오늘의 정치상황과 묘하게 맞물려 있어서 풍자하는 바도 크다. 권력을 탐하는 세력들의 과도한 욕심은 한 국가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영화감독의 제작의도와 관계없이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서울의 봄>이란 영화를 앞다투어 보게 되면서 검찰과 언론 재벌 등 기득권 세력들의 게걸스런 카르텔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깨시민들의 분노가 역사돌아보기 차원에서 단단히 뭉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참고로 12. 12사태와 관련한 인터넷 자료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1) 10.26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
2) 1979년 12월 12일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10.26 사태 이후 비상계엄 체제에 계엄 사령관과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있었던 정승화 대장이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에 의해 체포됐기 때문이다. 전혀 유례를 찾아볼 수도 있을 수도 없는 군내 하극상이었고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이 재가를 받지 않는 군사 반란이었다. 12. 12 군사 반란은 이를 주도하고 이를 발판으로 1981년 3월 3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하나회 수장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2. 12 군사 반란 당시 보안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보안 사령부는 박정희 정권을 유지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이 주도하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세력을 키우는 데 있어 결정적 보호막이었다.
육사 졸업생 중 우수한 영남 출신만 선별하여 가입을 받았으며 그들은 국 요직을 독점했고 진급과 보직에서 큰 혜택을 받았다. 군내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조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하나회의 힘은 군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체제가 붕괴되면서 계엄 사령관 자리에 오른 정승화 대장은 하나회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어 전두환의 보직을 지방으로 변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전두환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전두환은 자신에게 껄끄러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제거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자신보다 상관인 대장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전두환은 대통령의 사전 재가를 받지 못하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부관 등을 사살하고 강제 연행을 단행하였다. 그 이후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었던 전방 9사단 병력 일부와 하나회 세력이 군대가 서울로 진입하여 육군본부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하였다. 군을 지휘해야 할 국방부 장관은 사태 발생 후 몸을 피신하면서 실종 상태가 되어 사태 해결을 더 어렵게 했다. 최규하 대통령 역시 신군부 세력에 의해 대통령 또한 무력했으며 결국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 안을 재가하면서 군사 반란은 마무리 됐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재판을 통해 내란 방조죄로 7년형을 받아 이들병으로 강제 예편되는 수모를 겪었고 전두환의 반대편에 있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공수부대장 등 나머지도 예편당했다. 그 이후 신군부 세력은 권력을 하나하나 장악했고 또 다른 군사정권을 창출했다. 이렇게 탄생한 제5공화국 유신체제 붕괴 후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들의 뜻과는 거리가 먼 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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