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극 ‘가위바위보 세상’
대본, 연출/ 이권주
무대에는 의자 서너 개와 적당한 높이의 탁자, 그리고 뒤쪽으로 배경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스크린 정도만 펼쳐져 있으면 된다. 암전 상태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다가 서서히 잦아들고 무대가 밝아지면 여인 두 명과 중년의 남자가 보인다. 어느 모임의 회원들이다. 여인들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가 곧 대사를 시작하고,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시집을 읽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복장은 어떠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등장인물
A, B, C 3명
A: 아현님, 상주 동학축제에서 시낭송 하신 적 있지요?
B: 예, 당시에 갑자기 초청 받은 것이라 어쩔 줄 몰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A: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분께서 아현님의 시낭송이 아주 좋았다고 하면서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듣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때 낭송했던 작품이 무엇이지요?
B: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었어요. 1984년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했죠. 제가 홀딱 반해버린 시입니다. 동학운동의 선봉장이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는 한 장의 사진을 본 적 있으시죠? 안도현 시인은 그 사진을 예사로 보지 않고 한 편의 멋진 시로 승화해 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 그랬군요. 지배층에 수탈 당하는 백성들의 한과 외세의 위협에 좌우되는 나라의 현실을 괴로워했던, 한 혁명가의 이미지를 살린 시라고 보면 되겠지요?
B: 정인님께서는 잘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사이) 안도현 시인 하면 떠오르는 짤막한 시가 하나 있죠. 너무도 유명한!!!(스크린에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영상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시 안도현, 낭송 유민숙이라고 쓴 화면이 보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A: 메시지가 강렬합니다. 자신을 태워 한줌의 재로 남은 연탄재를 보면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몰염치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시, 저도 그 시의 울림에 크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C: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남자가 슬며시 끼어든다) 두 분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저도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데 (두 분을 살피며 천천히) 괜찮겠지요? (A와 B 서로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B: 좋습니다.
A: 말씀해 보시지요.
C: 아시다시피 몇 줄 안 되는 짧은시지만 참 좋은 작품들이 많지요. 그런데 시낭송 분야에서는 그 길이와 호흡이 짧다는 이유로 거의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아는 짧은시를 두세 편 정도 소개하고 그 시가 던지는 메시지라든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솔직하게 표현해 보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A: (B를 잠시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조금 부담스럽긴 하네요. 그냥 짧은시를 천천히 낭송만 하는 게 어떨까요? 설명 자체가 오히려 군더더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B: 우리끼리 생각을 나누는 자리인데, 무슨 얘기인들 못하겠습니까? 이 선생님 제안대로 한번 해 봅시다. 시는 짧지만 그 여백이 크기 때문에 감상을 말하다 보면 서로의 생각을 비교해 볼 수 있으니까요.
A: 그렇다면 좋아요. (바라보며) 이 선생님부터 시작해 보시지요.
C: 제가 먼저 하라구요?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 일단 저의 제안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대사 끝나면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 선생은 천천히 일어나서 김윤현 시인의 '가위바위보 세상'을 낭송한다. 스크린에는 가위 바위 보 이미지 파일이 보인다.)
가위바위보 세상(김윤현)//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가위를 내면,/ 상대가 보를 내면 이기고, 바위를 내면 진다/ 바위를 내거나 보를 내도 이기고 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 세상은 이겼다 졌다 하는 곳/ 이기기만 하면 밤의 세상이 없는 낮의 세상이 되고/ 지기만 하면 낮의 세상이 없는 밤의 세상이 되지/ 낮과 밤이 있어 온전해지는 세상/ 이기기만 할 수도 없고 지기만 하지도 않는/ 가위바위보 세상이 세상이지. (낭송이 끝나면 이미지 파일이 곧바로 사라진다.)
이 시를 쓴 김윤현 시인은 세상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철학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낮과 밤이 있어 세상이 온전해진다’고 표현했는데, 그 균형이 깨지면 세상은 망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구요. 지지 않고 이기려고만 하고, 남은 틀리고 내가 맞다고 하는 독선, 그 독선이 판치는 이 세상을 꾸짖고 있는 듯하거든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요. 아주 매력적이지요.
A: (고개를 끄덕이며)좋은 시를 소개해 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저는 윤석중의 <가을밤>이란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요즘이 가을에 접어드는 시점이기도 해서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음악이 따로 없다. 천천히 일어나면서 낭송한다) ㅡ ㅡ
가을밤 (윤석중).
문틈에서/ 드르렁드르렁/ 거 누구요?/ 문풍지예요// 창밖에서/ 바스락바스락/ 거 누구요?/ 가랑잎이예요// 문구멍으로/ 기웃기웃/ 거 누구요?/ 달빛이예요. (사이)
(말의 느린 속도가 느껴질 정도로) 깊어가는 가을밤 창밖에서 문틈, 문구멍으로 스며드는 소리와 빛을 포착해서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시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느꼈던 시골집의 가을밤 풍경과 비슷해서 가슴에 금방 새겨지더라구요.
B: 저는 함민복 시인의 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가을(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사이)
단 두 줄의 짧은 시지요. 어느 가을날, 사랑하는 사람을 잠시도 잊지 못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숨어있는 듯합니다. 그 마음을, 티비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경험과 잘 대비시켜 놓은 것 같지요? ‘생각을 켜놓은 채’라는 표현에 저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요.
C: 후한 점수라,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좋습니다.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혹시 정현종 시인의 '섬'이란 시를 아시나요? (반응을 살핀다.) 그 시도 단 두 줄의 짧은시지요. 한 번 들어보시고 좋으면 후한 점수 부탁드릴게요.
섬(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사이)
이 시에서, 가고 싶은 섬이란 어떤 곳일까요? 섬의 이미지는 대체로 고독일 텐데 섬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했으니 단순한 고독의 섬은 아닐 것 같구요, 오히려 단절된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의사소통의 공간'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섬이란 공간은 문학 또는 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미소 지으면서)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A: 해석이 멋집니다. 후한 점수 드릴게요. (웃음끼가 있는 어조로) 저는 아주 재미있는 시가 하나 있어서 또 가져와 봤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인데, 들어 보셔요.
이 바쁜데 웬 설사(김용택)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은 많지요.
(사이)
이런 상황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웃으면서) 거의 미칠 지경 아니겠습니까? 당장 해결하기 전까지 겪는 신체적 고통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정신적 고통은 또 어떨까요? (사이, 고개를 흔들며) 결국,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 인간들의 한계까지도 느끼게 하는 시가 아닐까 합니다. (B를 향해) 지나친 비약일까요?
B: 아뇨, 좋습니다. 저는 그 시 자체의 재미에 더 마음이 가는군요. (사이) 생명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청마 유치환시인에게도 짧은시가 있다는 것, 아셔요?
낙엽(유치환)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사이)
추억을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낙엽에 비유하여 하나하나 쓸고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낙엽에 얽힌 너에 대한 추억이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많이 남아 있으나 단 두 줄의 시행으로 감정을 절제하고 있어서 너를 향한 시인의 정성과 태도가 진실되게 느껴집니다.
A, B, C는 각각 무대를 향하여 적당한 간격으로 서되 C가 앞쪽에 위치한다.
C: (관객석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우리 세 명의 회원들이 각각 두세 편의 짧은 시를 소개해 드렸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절절함은 아닐지라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만큼은 강렬해서 깊은 울림으로 새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짧은 시의 매력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한 편씩 짧은시를 더 소개해 드리고 저희들은 물러가겠습니다. 끝까지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무대 옆으로 이동하면 B가 천천히 앞쪽으로 나온다.)
어울리는 음악과 함께 천천히 낭송한다.(B-A-C 순서대로) 덧붙이는 말은 더이상 필요가 없다. 시차를 두고 낭송을 마치면 한 명씩 무대에서 퇴장한다.
B <괜찮다, 심동현>
어느 날/ 작은새가 나무에게 말했다// 내 의자가 되어주고/ 내 동지가 되어주는데/ 난 아무것도 해줄 게 없어요/ 미안해요// 나무가 작은 새에게 말했다// 너의 지저귐은 좋은 노랫소리였고/ 너가 지은 둥지는 나의 옷이 되었다/ 내게 앉는 너는 나의 난로였다/ 그러니/ 괜찮다// (퇴장)
A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퇴장)
C <나 하나 꽃 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는 것 아니겠느냐.(퇴장)
C가 마지막으로 퇴장할 때, 뒷면의 스크린에는 ‘짧은 시 깊은 울림’이라 쓴 자막이 보이고 잠시 후 사라지면서 조명 꺼지고 클로징 음악 잠시 흐르다가 조명 다시 밝아진다. 세 명의 배우가 무대로 돌아와 관객석을 향하여 머리숙여 정중히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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