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인과 임실
김경식 글 / 사진
들꽃들이 흔들리는 강둑을 걸으며 감미로운 초여름의 바람 냄새를 맡아 보시라.
봄꽃들은 분분히 졌지만 아직 찔레꽃은 해쓱한 하얀 얼굴을 내밀고 있어 강변길은 황홀하고 아름답다. 아름다움 속에는 슬픔과 상처가 스멀거리며 다가서지만 강물은 아랑곳 하지 않고 속절없이 흘러간다.
강마을이 고향인 사람들은 강변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유년의 추억은 강을 따라 마을을 휘돌며 끝없이 흘러간다. 산마을이 고향인 사람들은 지게지고 오르내리던 산길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게 될 것이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을 고향으로 간직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30년 이상 교직에 종사하며 살았던 사람을 만나러 떠난다.
게다가 그 분은 유명 시인이 아닌가. 섬진강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용택 시인이다.
큰 개울같은 섬진강은 그의 고향 덕치면 장산리(진메) 마을 앞을 휘돌아 흘러간다.
회문산이 보이는 김용택 시인 진메 마을 전경
이런 지정학적인 입지조건이 있었기에 섬진강을 주제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모른다.
작가는 자신의 고향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아마 김용택 시인을 두고 하는 말이 될 것이다.
임실군은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다. 전주시와 남원시 사이에 끼어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한적한 고장이다. 전북의 다른 지역보다 산지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령산맥을 타고 뻗어 내린 활기찬 지맥이 임실의 큰 산인 성수산, 두만산, 백련산, 회문산 등을 우뚝 세웠다. 이런 산골짜기를 흘러나온 섬진강 상류 물을 모아 담은 호수가 옥정호이다. 산마을을 적시면서 흘러왔던 야성적인 여울은 옥정호에서 감옥같이 갇힌다.
이곳에서 순하게 변한 물은 호수를 흘러나와 몇 계곡을 휘돌아 흐른다. 이때부터 비로소 섬진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개울같은 강물은 계곡을 휘감아 돌면서 생기를 회복한다. 이 강물이 김용택 시인의 고향 마을 앞을 흘러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벌써 섬진강변의 마을들이 눈에 삼삼하다.
그곳이 어디던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진메 )이다.
임실이란 이름은 오래된 지명이다. 백제 때부터 불러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중종때
운수(雲水)라는 지명을 얻은 적이 있지만 이내 임실로 복원되었다.
김용택 시인 생가 가는 길
운수(雲水), ‘구름과 물의 마을’, 참으로 시적인 이름이다. 임실(任實)이란 지명의 한자적인 뜻은 ‘충실한 열매’이다. 또한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란 우리말 지명의 해석도 가능하리라. 나는 임실을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마을’로 생각하며 길을 떠난다.
이런 이름에 화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이 이름은 죽은 이름이 될 것이다.
구름과 물의 마을,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이 산다는 마을’ 이란 지명만을 가지고도 이 곳의 정경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김용택 시인은 그의 대표시 ‘섬진강’에서 자신의 고향을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시 ‘섬진강’을 읽고 떠난다면 그의 문학과 섬진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김용택 시인 시 ‘섬진강 1’ 전문
김용택 시인 생가
1987년 가을 나는 박성준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한백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이 교회는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민중들의 삶과 민족의 통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교회였다. 한백이란 교회 이름을 ‘한라에서 백두까지’에서 따왔을 정도로 민족적인 정서가 풍성했다.
박성준 목사의 사모는 한명숙씨였다. 당시 이들 부부의 삶은 곤고했다. 13년 동안 시국사범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박성준 목사는 개척교회의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열정으로 설교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늘 한 편의 시를 읽곤 했는데, 이 때 단골로 읽던 시가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이었다.
당시 가난한 목사의 아내로 막 돌이 지난 아들을 돌보던 박 목사의 아내가 총리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지난 세월 우리나라는 대변혁의 시기였다.
당시 그녀는 아주 가난하고 이름 없는 목사의 아내였지만 눈이 맑고 학구열이 강했다.
그런 그녀 역시 예배시간에 김용택 시인의 시를 함께 읽던 사람이다.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 날 한명숙 전총리가 읽은 조사를 듣고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으리라. 그가 조사를 시낭송 하듯 읽었던 것은 아마도 이무렵 읽었던 시낭송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훗날 박성준 목사는 목회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과 미국유학을 거쳐 성공회대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감옥에서 많은 독서를 하였기 때문에 시를 알아보는 감각이 대단했다. 김용택 시인의 시집 <섬진강>이 잘 팔릴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당시는 김용택 시인이 무명시절이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김용택 시인의 첫 시집 ‘섬진강’ 맨 뒷장에는 당시 만년필로 써 내려간
내 필적이 선명하게 지금도 남아 있다.
“목련꽃 떨어지고 흐드러진 진달래, 철쭉마저... 라일락 희디흰 자락 나풀거리면서 오월로 재촉한다. 사월에서 오월로 이어지는 현실에 부끄러운 것은 삶이 실천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1986년4월25일 김경식
이 글을 다시 읽으니 내 청년시절의 의식이 번득인다. 그 시절을 어떻게 용케 버티며 살아왔는지 대견한 생각이 머리를 타고 흘러내려 가슴을 흔든다. 23년이 흘러갔다. 그 시절 의식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문득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 시집은 김용택 시인의 첫 시집으로 1985년 1월15일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냈다.
나는 금년 봄에 전주에서 김용택 시인을 만나 그의 첫 시집 섬진강 맨 앞장에 사인을 받기도 했다. 시집을 구입한 후 23년이 되어 저자에게 사인을 받은 것이다.
김용택 시인는 내게 “오래된 시집을 가지고 있네요,” 라고 했다.
김용택 시인과 함께
지금 회고해 보면 시도 좋았지만 그 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후기를 옮겨 본다.
온갖 수난과 박해 속에서도 농사꾼으로 아름답게 살다 가신 우리 아버지, 나는 그분을 가장 역사적인 삶으로 일관해 오신 분으로 생각한다. 나는 평생을 몸부림으로 살아도 그분의 삶 한 끄트머리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숨이 컥컥 막히는 봄볕 속에서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태양 속에 일과 함께 들어 가셨다가 집에 오실 때면 얼굴이 팅팅 부었어도 쉴 때면 허리가, 온 삭신이 아프시다며 한참을 쉬지 않으시는 우리 어머니, 이 글들은 그분들께 참으로 하찮은 이야기이다. “시가 다 뭣이다냐, 고것이 뭐여, 뭔 소용이여” 하시는 어머님의 물음은 곧 내 물음이 되어 우리 땅을 향한 내 채찍이 되어 나를 늘 후려쳐 피 흘리게 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 많으시고 쾌활하시며 매사에 거침새가 없고 사람들 간에 허심탄회하신 마음의 정갈하심, 끝없이 삶에 대해 낙천적이신 어머님은 내 나머지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 김용택 시인 시집 ‘섬진강’ 후기에서
‘섬진강1’에서 단연 시의 힘을 발휘한 부분은 시작 부분이다.
이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 김용택 시인 시 섬진강1 부분
김용택 시인 고향 앞을 흐르는 섬진강 상류
밤꽃향기 진동하는 오월과 유월로 이어지는 우리의 산과 들은 녹색의 향연을 연출한다.
이 시에는 이런 분위기에 흘러가는 섬진강과 강변을 서정적인 수채화로 물들이고 있다.
이미 김용택 시인은 첫시집 섬진강 후기에서 자신 어머니의 삶을 잊지 않고 지침처럼 여기면서 살겠다고 했다. 이 말처럼 그는 살아왔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면 자신이 하던 일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철새 같은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고향의 강 언덕에 있는 덕치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선생님으로 일관했다. 결코 서울을 넘보지 않고 자신이 나고 자란 섬진강변의 자연을 노래했다.
섬진강의 연작시에는 서정적인 섬세한 시어 덩어리가 강물에 풀어져 흘러간다. 이 강물을 흘러가며 이름없는 섬진강변의 마을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그의 시어 속에는 늘 아름다운 자연과 아이들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 농촌의 황폐함에 화를 내기도 하고 가슴을 조이기도 한다. 고단하고 평박한 삶을 견디며 살아 온 농민들을 위로하고, 폐가들이 많아진 우리의 농촌 마을과 묵정밭들이 된 땅을 보며 가슴 아파한다. 민중문학의 작가들이 억센 언어들과 격문 같은 시어를 난발 할 때, 그는 실제 농민들의 시어를 발견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과 일치하는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가 현실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부모님과 형제 친척들을 주체적인 인물들로 형상화 할 줄 아는 역사관을 지녔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는 어느 날 유명작가가 된 것이 아니다. 섬진강 둑길을 따라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그는 우리 민족과 역사 문학에 관한 내공을 쌓았다. 섬진강 주변, 농촌의 실천적인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었다면 그는 단박에 이삿짐을 꾸려 서울로 올라왔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다녔던 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계속 섬진강 둑을 걸어 학교와 집을 오고 갔다. 이 길섶에서 그는 꽃의 향기를 구별하고 숲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키웠다. 계속 흘러오는 섬진강에서 마르지 않는 시심을 계속해서 길어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김용택 시인의 고향 마을로 가기 전에 사선대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초원장’이란 한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단체 예약을 하기 위해서다. 임실군 문화관광과에서 이 집을 추천해 주었는데 막상 들어서니 손님이 많아서 인지 불친절하다. 임실읍을 돌아 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식당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먼 거리 사선대를 찾아야 했다.
초원장은 음식 맛이 좋고 식당 분위기도 괜찮다. 임실군에서는 이 정도의 식당을 찾기도 쉽지 않다. 임실은 외지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식당을 정하는 것은 우선 맛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식당 분위기가 좌우한다. 최후의 결정 때는 나는 늘 식당이 문학기행 답사객 들에게 어울리는가를 면밀히 검토한다. 이를 위해 몇 군데의 식사를 하곤 한다. 그런데 임실에서는 이 집과 견줄만한 집을 발견하지 못했다.
조금 불친절하지만 이곳을 선정한 이유다. 마음이 홀가분하지 않아서 사선대 답사에 나선다.
사선대는 임실군민들이 자랑하는 명소이다. 전주 남원간 17번 국도에 세워진 ‘사선문’의 모습이 사뭇 위용이 있다. 사선문은 임실의 관문이라 해도 좋으리라. 임실의 초입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호남고속도로 전주나들목으로 진입하여 그대로 직진하여 전주시 우회도로를 타면 된다. 이 길을 계속 직진하면 전주역과 아중역 앞을 지나 작은 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17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남원과 임실로 이어지는 17번 국도가 기다린다. 간간히 신호등이 있지만 4차선 도로는 정체구간이 없다. 이 국도로 얼마 후에 전주 남원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더 한산해 질 것이다. ‘관촌’이란 지명이 나오면 이내 사선대 이정표가 크게 보인다. 이내 사선문에 닿는다.
사선대조각공원
사선대 아래로는 오원천(烏院川)이 휘돌아 흘러간다. 진안에서 시작되어 흘러온 개울물은 사선대의 오원천에 와서는 사뭇 강같은 모습을 유지한다. 이 강변에 인접한 사선대 주변은 울창한 숲이 운치를 더한 비경이다. 사선대라는 이름을 얻게 된 유래는 사뭇 전설같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진안 마이산의 두 신선과 운수산의 두 신선이 이 강변에서 놀았다.
신선들은 병풍처럼 아름다운 산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때 홀연히 까마귀들이 날면서 하늘에서 네 선녀들이 내려와 신선들을 호위하여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사선대(四仙臺)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까마귀가 날아 올랐던 이 강변을 오원강(烏院江)이라 불렀다.
그러나 강이라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수량이 부족하다. 하긴 강들은 계절에 따라 수량에 많은 차이가 있다.
사선대 꼭대기에 있는 ‘운서정’ 가는 길은 아직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많이 올랐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통 오르는 사람들이 없는 듯 산길을 오르는데 인적이 없다. 거미줄을 헤치면서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운서정에 오르니 신선이 된 듯 기분이 날아 갈 듯하다. 누워서 하늘을 보고 삽상한 바람을 쏘이니 긴장과 피로가 날아갔다.
운서정은 임실에서는 보기 드문 조선시대 건축양식이다. 이곳은 일제 하에 애국지사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곳이다. 운서정에서 내려다 보면 사방 몇 십리까지를 전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백제 무왕 때 축성되었다는 성미산성으로 이어진 산길은 호젓하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곳에서 경사진 곳을 내려오면 ‘사선대조각공원’에 닿는다. ‘사선녀’, ‘음과 양’, ‘지구촌의 평화’ 등의 이름을 가진 많은 조각품이 눈길을 끄는데, 특히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은 너무 적나라한 모습이다.
임실군청이 있는 임실읍에 들러 임실향교를 찾아 갔더니 향교문은 굳게 잠겨 있다. 향교 들어가는 고샅길은 퇴락한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오히려 정겹다.
임실향교의 늙은 은행나무에게 인사를 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던 것이 섭섭하다.
다만 임실향교의 골목길에서 내 유년의 저편에 일렁이던 가난의 그림자들이 스멀거리면서 다가서는 것을 느낀다. 유년시절 고샅길에서 뛰어놀던 친구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세월을 돌아보면 조붓한 고샅길에서 깨금발로 뛰어 놀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지금 어디선가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가느라 힘겨워하고 있을 것이다.
임실읍에서 덕치면까지는 차량으로도 한참을 달려가야 한다. 같은 임실군이라도 거의 끝에서 끝이기 때문이다. 산과 들판을 보며 달려간다. 평범한 우리 국토에 애정이 솟는다. 빨리 섬진강이 보고 싶다. 이럴 때 그의 시‘그 강에 가고 싶다’ 라는 시를 읽으면 마음을 추수릴 수 있다.
사선대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이 아니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그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시인의 시 ‘그 강에 가고 싶다’ 전문
이 시는 3연 22행으로 된 시이다. 섬진강의 짙은 서정성을 표현하던 시인은 이제 인생살이의 깊은 관조와 사색을 하고 있음이 보인다. 이 시는 깊고 높은 철학 경지를 보여주는 시다.
"인자는 나도 /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라는 자기 확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정도의 확신이 있기에 그는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끝까지 하면서 깊고 좁은 이 강마을과 산마을에서 평생을 살아 왔는지 모른다.
그의 초기 시가 자신이 낳고 자란 덕치면 섬진강변 마을들의 실존적인 정서를 담아 내었다면, 이 시는 그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리는 징후가 농후하다. 내면에 일렁이고 있는 삶의 올곧은 철학적 성찰이 그득한 사색의 강을 표현하고 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느림의 미학속에 그가 가야 할 길이 빠른 길이 결코 아님을 그는 강물을 보면서 찾아 내었다. 이런 생각의 사색이 있었기에 시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강 길을 걸으면서 이 시를 읽고 나면, 김용택 시인이 지향하는 삶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실존의 강이 아닌 내면의 강이 그리운 사람들은 이 시를 읽고 음미할 일이다.
덕치면 소재지를 지나 승용차로 5분정도를 달려가면 산 아래 덕치초등학교가 앉아 있다.
덕치초등학교
경사진 곳을 올라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교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이 학교의 명물인 늙은 벚나무들이 즐비하다. 1936년에 개교한 학교이니 70년이 넘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학교이다. 운동장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있고 늙은 벚나무 아래서는 아이들이 야외수업을 받고 있다.
개교때 심었다는 벚나무의 수령도 어언 70살이다. 그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누워 우듬지 사이로 하늘을 본다. 바람은 솔솔불어 잠이 온다. 그러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잠이 오지 않는다.
일어나 교정을 거닐어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어느 노인이 손을 흔들면서 부른다.
“이리 좀 오씨오” “맥주 한잔 하실랑가?”
조계원(77세)이란 분이다. 덕치초등학교에 일 주일에 몇 번 와서 허드렛일을 하고 가신다고 한다. “학교에 학생이 없어서 큰일이제, 폐교가 걱정돼야”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
현재 덕치초등학교 전교생은 약 40명 정도라고 한다. 김용택 시인이 30년이 넘는 동안 줄곧 교사로 있었기에 폐교를 면한 곳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워낙 세상에 많이 알려진 학교가 아닌가. 지금 이 학교에는 서울에서 몇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회문산에 아래 자리 잡은 덕치초등학교는 6,25 전쟁 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탄다. 김용택 시인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벚나무 아래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조계원 옹에게 김용택 시인의 고향 마을 장산리 가는 길을 묻는다.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김용택 시인은 덕치초등학교와 진메 마을을 오고 가면서 강과 산과 들에 감동을 받아 시인이 된 사람이다.
그에게 이곳의 자연은 신비함과 서정성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자신의 고향을 버린 사람들처럼 그는 결코 자기가 나고 자란 마을을 폄하하지 않는다.
진메마을 사람들과 주변의 자연을 사랑하고 아껴 주었다.
푸르러지는 봄산, 짙은 녹음의 여름산, 붉어지는 가을산, 맨몸이 되는 겨울산의 아름다운 정경에 몸살이 나면 원고지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고향의 산과 꽃, 피고 지는 강변, 달빛에 살고 죽는 물결을 사랑하며 살아 왔다. 그러나 결코 고향 사람들의 고된 노동의 힘겨운 몸짓들을 놓치지 않았다.
덕치초등학교 상징 벚나무
덕치초등학교의 풀잎과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도 관심을 가졌기에 그토록 오랜 기간 이 학교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덕치초등학교에서 김용택 시인의 고향마을 장산(長山)리로 가기 위해서는 긴 강둑을 따라 가야 한다. ‘장산’(長山)의 순 우리말은 ‘진메’(긴뫼)이다. 마을 이름이 진메는 동네 앞산의 산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려 있기 때문이다. 진메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을 떠올릴 수 있는 분위기 때문이다.
먼지를 일으키며 포장 되지 않은 길을 시속 10km로 달린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반긴다. 마을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과 밭, 물이다.
진메마을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과 산 사이를 섬진강이 흐른다.
소담스런 강변 마을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희미하게 회문산이 보인다.
느티나무 두 그루는 형제처럼 서 있다. 느티나무 한 그루는 200살이 넘었을 것처럼 보이고
한그루 역시 100살은 족히 넘었으리라. 느티나무 그늘에 번갈아 앉아 산과 강을 본다.
이곳에서는 김용택 시인의 시 ‘산’을 읽는다면 잘 어울리는 곳이 될 것이다.
강물을 따라 길을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 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 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색 구절초꽃 곁을 지날 때 구절초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 번 피었다가 지는 꽃이야
너도 나처럼 이렇게 꽃 피워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나처럼 뿌리를 내려 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아래를 지날 때 구름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별게 아니야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 다녔다네
산은 말이 없네
산은 지금까지 내게 한마디 말이 없네
--김용택 시인 시 ‘산’ 전문
장산리(진메) 그의 고향마을은 예전에 37가구에 살던 당당한 마을이었다. 그런대 지금은 14가구에 노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김용택 시인의 생가로 인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을엔 생기가 돈다.
김용택 시인은 본래 농민이 되었을 사람이다. 그는 순창농고를 졸업한 후에 돼지와 오리 사육을 하였지만 실패한다. 서울에서 몇 달 살면서 살 궁리도 해 보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다시 고향 진메마을로 돌아왔다가 살 궁리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친구 권철하의 권유로 얼떨결에 초등학교 임용시험를 보아 합격한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임용시험에 합격한 후에 몇 개월 연수를 받으면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만큼 교사가 부족하던 시대였다. 이때 만약 그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작가가 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인생은 때로 우연한 기회가 평생을 좌우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김용택 시인의 삶도 여기에 해당된다.
김용택 시인은 1972년부터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조용한 산골에서 교사생활은 무료하고 답답했다. 그런 어느날 산골로 책을 팔러온 월부 책장사에게 산 도스토엡스키 전집을 구입하여 읽고 세상사에 눈을 뜨게 된다. 책표지가 아름다워 처음에 산 것이지만 책을 읽고 나니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후에 헤르만 헤세 전집, 이어령 전집, 박목월 전집, 괴테전집, 니체전집등을 구입한다. 그는 이런 책들을 통해서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그가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월부책장수의 덕인지 모른다.
김용택 시인 서재
독서 후에 그는 내적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느티나무, 앞산, 강가의 돌멩이 같은 평상시 하찮게 보이던 자연의 부산물들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독서력은 오늘날의 시인이 되는 기초가 되어 주었다.
김용택 시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섬진강의 자연을 노래하여 출세한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그는 많은 독서가이며, 강한 역사성과 철학성을 가진 시인이다. 때로 그의 시속에는 강한 사회비판과 저항정신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될 무렵 그의 눈에 비친 농민들은 억압받고 착취 당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누군가에 의해 오랫동안 자신들을 괴롭히고 억압을 당해도 인간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농민들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지식인들의 의식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고 버림받고 있는 농민들의 가슴을 믿었다. 길지 않은 인생길에서 인간성을 포기한 건 오히려 시대를 이끈다는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1982년 김용택 시인은 늦었지만 자신의 시를 세상에 흘려 보낸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일기처럼 쓰기 시작한 시를 섬진강변의 서정을 담아 세상 속으로 흘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습작시절만 무려 13년이었던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과연 본인이 쓰고 있는 것이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에 이러한 자문을 구할 사람도 없었다. 이 무렵 완성도가 있다고 판단한 시를 골라 창작과 비평사에 보냈더니 시집에 게재된다고 알려 왔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이렇게 해서 1982년에 등단했다. 그는 형식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고향 생가를 방문하여 관광사진 촬영하듯 자신을 모델로 앞장세우는 것에 난색을 표한다.
김용택 시인은 자신의 시집이 출간 될 때마다 환경재단과 아름다운재단 등에 인세를 기부해왔다. 금년 봄에 전주 자택에서 나에게 직접 사인을 해 준 시집 <수양버들> 인세 역시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다고 한다. <수양버들>은 그의 열 번째 시집으로 57편시가 담겨져 있다.
그는 독서가이기도 하다. 서재에는 책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책들은 전주의 자택에 있다. 내가 전주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았을 때도 서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시인들이 자신을 높이고 독서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생색 내는것을 그는 질색한다.
나는 전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내가 2002년 가을에 펴낸 ‘72인의 한국현역대표육필시집’을 건네며 나의 이력을 전달해 주었다.
당시 김용택 시인은 나의 부탁으로 육필시를 보내 왔고 그 시집속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집한 육필시를 모아 출간을 하였던 것도 벌써 7년이 지나 갔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전북 임실 덕치면 장산리(진메)에서 태어 났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 펴낸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 ‘섬진강 ’ 등을 발표하며 시작 활동을 시작한다.
공립초등학교 교사는 본래 5년마다 자리를 옮겨야 하지만 언제나 덕치초등학교 근무를 자원했다. 이 곳은 교통이 불편하여 근무 지원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30년 넘게 덕치초등학교에서 근무한다. 이 학교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잉태하며 자식 같은 시편들을 섬진강에 풀어 멀리까지 떠나 보냈다.
덕치초등학교 교정
첫 시집 <섬진강>에 수록된 시들은 거의 이 학교 숙직실에서 쓰여진 시라고 한다. 이후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 <그리운 꽃 편지>, <수양버들> 등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등을 출간하며 많은 독자를 확보한다.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오래된 마을> 등도 펴낸다. 우리의 농촌 현실을 담아낸 농촌시와 서정시의 지경을 좀 더 넓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평을 받아 김수영문학상(1986년), 소월시문학상(1997년), 소충사선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분이였기에 그는 한가하게 동네 앞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서 시를 쓰지 않았다. 젊은 교사시절에는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다. 전주에 살면서 부터는 환경운동으로 뛰어 다니면서 시를 쓰고 있다. 시간은 이리 빠르고 세월의 강을 건너듯 모두들 분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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