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명희선생과 남원
글.사진 / 김경식
글쓰기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여인이 있다. 단어 몇 개의 선택에도 몇 날이 걸리기도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예리한 만년필로 12,000여장에 혼불을 새기고 떠났다. 자신의 가슴과 머리에서 흐르던 역사와 민족의 피를 뽑아 원고지를 메웠다. 결국 그녀의 글쓰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아름답고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진실 같은 소설을 탄생시킨다.
소설을 누가 허구라고 하였는가.
그래, 소설을 허구라고 치자. 그러나 진실보다 더 진정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있다.
장구한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는 유독 절망의 시대가 많았다. 전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민족의 침략으로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능멸을 당했던 조상들의 삶을 생각하면 슬프고 답답하다.
참혹한 절망의 시대였다. 이런 절망시대 중에서 그녀는 일제 식민지 기간이었던 1930년대를 선택한다.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민족의 대부분이 절대빈곤으로 시달리던 시대에 삶과 사랑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보따리를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원고지로 옮겼다.
그녀의 이름은 최명희(1948~1998)이다. 그가 자신의 원고지에 피와 땀과 눈물을 적시며 혼신을 다해 쓴 소설의 제목이 ‘혼불’이다.
서도역
삼월이 가고 있는데도 꽃샘추위가 며칠간격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꽃샘추위의 한자 표현은 꽃 피는 것을 시기하여 아양을 떤다는 뜻으로 화투연(花妬姸)이다.금년에는 경제 한파의 영향인지 날씨마저 사람들의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이런 봄 날씨를 두고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하였던가. “분명 봄은 왔는데 봄이 아니다”봄은 왔지만 꽃샘추위에 겨울옷을 다시 입어야 할 때 흔히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을 무심하게 쓰곤 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말은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 에서 따온 말이다.한나라 원제(元帝)의 후궁인 왕소군이 흉노족 왕에게 조공으로 보내졌던 한나라 때의 상황을 회상하며 쓴 싯구다. 그녀는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명이 아닌가.
문학이 위대한 것은 이런 전달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오랑캐 땅엔 꽃이 피지 않고 새싹도 피지 않았으니봄이 왔지만 아직 진정한 봄은 아직 오지 않았네.”
-- 동방규 시 왕소군 중에서 (김경식 번역)
시인 동방규가 중국 북방에 있는 사막을 지나며 왕소군이 강제로 흉노의 왕에게 보내지던상황을 회상하며 주변 풍경을 그대로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제절망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인생살이를 고비를 비유적으로 일컬을 때 자주 쓰인다.
작은 불꽃도 스러지기 전에는 마지막 한순간 오히려 더 환한 빛을 발산하면서 제 목숨을 거둔다.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겨울 끝자락의 추위가 쉽게 물러나지 않는 이유도 이럴 것이다.
한나라 원제(元帝)에게는 궁녀가 많아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화공을 시켜 궁녀들의 얼굴을 그렸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궁녀를 선정한다. 이런 이유로 궁녀들은 당시 궁중화가였던 毛延壽(모연수)에게 뇌물을 주면서 까지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그려줄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왕소군은 그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몹시 추하게 그려 황제에게 보였기에 그녀는 황제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나라는 역대로 흉노의 침입으로 고민했다. 오죽했으면 만리장성을 쌓았겠는가. 이 무렵 흉노왕 호한야(胡韓邪)는 한나라의 미녀를 데려 와 왕비로 삼겠다고 통보한다. 이에 한나라 원제는 못생긴 왕소군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명한다. 그러나 흉노로 떠나가는 왕소군을 보니 자신이 지금까지 보았던 여인 중에서 가장 미인이 아닌가. 이미 때는 늦었다. 화가 난 황제는 화공 모연수를 처형한다. 이런 사연을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는 마음에 새기며 시를 쓴다. ‘춘래불사춘’은 이렇게 해서 오늘날 까지 회자되고 있다.
서도역 기차길
경제 한파와 간혹 불어 예는 꽃샘추위에도 꽃은 피고 있다. 춘향전과 혼불의 작품의 무대인 남원으로 가는 길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내일이면 사월, 삼월의 마지막 날이다.서울을 떠난다. 서울에서 남원까지는 4시간을 자동차로 달려가야 한다. 경부고속도로를 출발하여 천안논산고속도로를 경유하여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빠져 나온다. 전주시내 주변을 휘돌아 17번 국도를 타고 남원에 닿는다.
남원은 춘향골이라 할 정도로 춘향전의 배경이 된 고장이다.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올려다 보이는 곳이며 그곳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광한루 앞을 흐른다. 남원 사람들은 이 개울을 요천이라고 부른다. 이 물을 끌어 들여 광한루의 연못을 만들었으니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과 인연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남원의 역사는 아득하다.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다. 남원은 역사적으로 마한지역에 속한 것이 통설이다. 마한은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영역의 국가였다.
지리산 기슭, 산내면 달궁리(덕동리) 지리산 기슭에는 옛 성터가 있다. 이 성터가 마한 왕이 전란을 피해 와서 쌓은 달궁터라는 설이 있다. 조선숙종 때인 1702년에 발행한 용성지(龍城誌)와 영조 때인 1765년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는 다음처럼 남원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설명한다.
황령과 정령은 둘 다 지리산 기슭에 입세에 있으며 몹시 가파르고 험하여 소나 말이 다닐 수 없는 곳인데 거기서 서쪽으로 남원부까지는 50리쯤 된다. 옛 승려 청허당의 황령기 에는 "옛날 한 소제 즉위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는데 그 때 황, 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두 사람의 성으로 고개 이름을 삼게 되었다. 그 도성을 유지한 것이 71년이었다.” 무너진 성과 허물어진 벽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 도성이었다는 곳을 세상에서는 달궁터라 전한다. 두 고개 안에 있는 긴 골짜기는 중고에는 남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속한다.
-- 서산대사 <황령기> 중에서
이 글속에 인용된 <황령기>의 저자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이다. 휴정은 그의 법명이며 청허는 서산과 함께 그의 호가 아닌가. ‘황령기’는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수도할 때 들었던 달궁에 얽힌 이야기를 써 놓은 글이다. 그가 유명한 고승이 된 것은 이런 기록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해남 대흥사 입구에 있는 청허당 부도탑을 답사할 때도 서늘하게 다가서던 그의 서기를 느끼지 않았던가.
노봉 마을
삼국시대 때 남원은 신라와 백제로 양분되는 과정을 거친다. 삼국 통일 후에 신라의 신문왕은 남원성을 쌓는다. 서기 757년 경덕왕 때는 남원소경을 설치하여 전주의 관할 밑에 둔다. 940년 고려 태조 때는 남원부로 격하된다. 이런 저런 것을 감안해도 남원이란 지명을 얻은 햇수는 1,000년이 훨씬 넘는다.남원에는 향소부곡이 존재했다.
고려 중기에는 행정구역 단위의 결정은 인구수나 면적에 따르지 않았다. 그 지방 출신의 인물, 씨족들의 영향력에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향, 소, 부곡은 주, 부, 군, 현 밑에 있던 최 말단 지방행정 조직이다. 향소부곡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부터 실시되어 고려 시대에 전성기를 거쳐 조선 중엽에 거의 사라진다.
남원부는 이때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농산물 집산지였다. 이런 지리적인 특성으로 물물교환지로써 상업이 발달하였다. 미약하지만 교환경제의 여건에 따라 향소에서 생산된 수공업 제품은 관수품을 공납하고 남은 제품은 자유 처분이 가능했다. 이런 물물교환에 의한 생계가 보장되기 때문에 향10개소, 소10개소, 부곡6개소가 존재했다.조선시대 남원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다. 그러나 남원 사람들의 민족성과 애국심은 우리 역사의 숭고한 역사의 숨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895년 남원부가 남원군이 된다. 1995년 남원시와 남원군과 통합하여 도농 복합형 남원시로 거듭난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던 17번 국도는 꽃길이다. 남원시에 도착하니 요천변의 벚꽃들이꽃망울을 터트리며 나그네의 방문을 환영한다, 삽상한 바람에 꽃잎들이 흔들린다. 강둑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서울의 날씨와는 사뭇 다르다.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광한루원 입구를 들어선다.
솟을 대문 형태의 삼문의 중앙문 위에는 청허부(淸虛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이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에서 따왔다. 사람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달나라 선녀가 살고 있다는 ‘광한청한부(廣寒淸虛府)’와 같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달나라는 춥고 넓기 때문에 넓은 광(廣) 추울(寒)을 써서 이름을 광한(廣寒)으로 지은 것이 재미있다.
광한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중의 한곳이다. 광한루의 나이는 1419년 건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고 1626년에 복원하였으니 380살이 넘었다.
평양의 부벽루는 북한에 있어 가볼 수 없는 곳이다. 진주 촉석루는 6ㆍ25 때 불에 쓰러져 1960년 복원하였다. 밀양의 영남루는 1844년에 건축하였으니 복원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광한루 역시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소된다. 그러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역사적으로 단연 으뜸이다.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인 <광한청허부>를 남원 땅에 조성하고 이 곳이 신선이 살만한 곳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광한루원은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와 전남 담양군의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할 만하다. 광한루원의 역사와 사상적인 배경은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광한루
광한루원은 서울 경복궁 경회루와 전남 담양군에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할 만하다. 광한루원의 역사와 사상적인 배경은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광한루 앞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한다.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 연못의 물빛에 눈이 부시다. 이 연못으로 흰 매화 꽃잎들이 너울거리며 떨어지고 있다. 작은 연못이지만 이곳에는 3개의 섬이 있다. 삼신산이라고 불린다. 연못 서쪽으로는 슬픈 사연을 간직한 아름다운 오작교가 누워있다. 오작교는 걷는 이들에게는 그냥 평평한 다리지만 측면에서 보면 형태가 약간은 타원형으로 보인다. 걷다 보면 직선적이고 평탄한 면에 율동감을 주는 듯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광한루 앞의 돌 자라는 동남방향으로 향해 앉아 있다. 이것은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광한루원의 이런 구성은 은하 세계를 상징한다.
1418년 황희는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이때 현재보다 작은 규모의 누각을 짓고 광통루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유배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누각을 지으며 살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444년 전라관찰사로 내려왔던 정인지에 의해서 이 누각은 광한루라 불리게 된다. “호남의 명승지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인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하고 감탄하여 그 후 ‘광한루’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와 여울이 되었다가 남원에 도달하여 작은 강이 된 요천강의 물을 끌어 들여 인공정원을 만든 후에 세운 누각은 크고 우람하다.
광한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과 동쪽에 3칸의 부속건물이 붙어 있는 팔작지붕의 2층으로 된 건축물이다.
보물 제281호로 지정될 정도로 건축학적인 가치가 있다. 그러나 광한루는 아무래도 춘향전의 무대이기에 유명세를 탔다고 보아야 한다. 남원하면 광한루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춘향전 때문이다. 광한루 우측 끝에는 1931년에 세워진 ‘춘향사당’이 있다.
춘향사당
춘향사당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광한루원의 맨 동쪽 모퉁이에 위치하여 몇 달 전에 방문하였을 때는 이곳을 알지 못해 그냥 지나쳤다. 이번 답사에는 다행히 공무원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를 따라 다니면서 그의 설명을 들었다. 공무원들이 시간이 없다고 채근한 모양인지 광한루는 그냥 스쳐 지나버려 그 곳에 관한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서운했다. 지난번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사실 광한루가 목적이었다. 광화루원의 각 건축물에도 그 나름대로 숨어 있는 이야기와 역사가 많다는 것을 이번 방문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계속해서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보다. 광한루에 예사롭지 않은 현판의 글씨가 번득인다. 먼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다. 조정훈 선생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 그는 민의원을 지낸 인물이니 아주 근대 사람이다. 일단 글씨가 우람하고 힘이 있다.
광한루 뒷 편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씨는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쓴 글씨다. 계관(桂觀)이란 편액은 동학혁명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에 남원의 유지였던 강대형 선생이 다시 써서 걸었다. 이 글씨도 예사롭지 않은 예술적인 서기를 품고 있다.
대나무 숲이 춘향사당을 감싸고 있다. 아마 그녀의 절개를 대나무에 비유하였으리라.
1931년 세웠으니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사당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당으로 인해 남원이 춘향골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춘향전이 존재했기에 사당을 건축했을 것이다. 이 집을 짓는데 일제의 방해공작이 많았다고 전한다. 일제는 이런 사당하나 짓는 것도 간섭하고 방해했다. 나라가 없다고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
춘향사당은 1931년 3월1일 날 건립한 것만 보아도 남원 사람들의 민족성을 알 만하다.<단심>이란 글을 읽으며 정문을 들어선다. 사당 정면에는 <열녀 춘향사>란 현액이 걸려 있다. 사당 안에는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춘향의 영정이 맑고 순결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영정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것이다.
춘향사당
<춘향관>은 박남재 화백이 춘향의 삶과 사랑을 그린 유화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춘향전이 소설이기 때문에 유물이 존재할 리가 만무하니 어쩔 수 없이 춘향전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런 노력들이 가상하다. 이곳에서 유독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의 옥중 시와 이몽룡이 어사로 남원에 내려와 변학도의 잔치에서 썼던 시였다. 이 시는 이미 청소년기에 암송했기에 유별나게 애착이 갔다. 당시 내가 춘향전을 대단한 작품으로 인정한 것은 사랑도 사랑이지만 이 시 때문이었다.
去歲何時君別妾(거세하시군별첩)
昨已冬節又動秋(작기동절우동추)
狂風半夜雨如雪(광풍반야우여설)
何爲南原獄中囚(하위남원옥중수)
나는 지나간 어느 해 어느 때에 임을 이별 하였던가
엊그제 겨울이더니 이제 또 다시 가을이 깊었네.
사나운 바람 부는 밤에 눈발같은 비는 내리는데
어찌하여 이내 몸은 남원 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는가.
--춘향 옥중시 김경식 번역
金樽美酒天人血(금준미주천인혈)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금동이의 향기로운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살이라
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구나.
--이몽룡의 어사시
다시 오작교를 건넌다.
옥황상제의 딸 직녀와 소몰이 견우의 사랑이야기는 오작교가 상징한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를 알게 된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견우와 직녀를 은하수의 서쪽과 동쪽으로 갈라놓는다. 그러나 견우와 직녀는 일 년에 단 한번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이날이 칠월칠석날이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야 할 장소는 은하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야 하지만 다리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까치와 까마귀들은 하늘로 올라가 자신의 몸으로 다리를 만든다.
견우와 직녀의 슬픈 사랑이야기에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게 되었는데 이게 비를 내리게 하였다. 까치의 머리가 흰 것은 견우가 직녀가 밟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전설의 이야기를 만든 선인들의 상상력이 놀랍다. 남원 사람들은 견우와 직녀의 사랑의 전설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았다. 광한루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고 그 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작교(烏鵲橋)를 놓았다. 까마귀 오(烏) 까치 작(鵲)자 다리 교(橋)가 아닌가.
이런 저런 전설속의 사랑이야기를 음미하면서 오작교를 걷는다. 신분을 초월한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야기는 광한루에서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으로 꽃을 피운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춘향전이 등장한 것은 파격적이다. 춘향전이 작자 미상인 것은 이런 것에 기인되는 것인지 모른다.
광한루
오작교는 1582년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수리할 때 놓았다. 호수 주변의 늙은 버드나무도 이 때 심은 것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것은 이 나무 밖에 없다. 그래서 우람하고 귀이한 모양을 하며 떡 버티고 있는 왕버드나무는 이 광한루원의 진정한 보물이다.
놀라운 사실은 버드나무와 오작교는 남원이 모두 파괴 되었던 정유재란 때도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길이 57m, 폭 2.4m, 4개의 무지개 교각으로 이루어진 오작교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몽룡이 백년가약을 맺었던 월매집의 마당을 걷는다. 부용당과 행랑채를 들여다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에 관심이 많고 간절한지 확인한다.
완월루가 보인다.
지금은 사라진 남원성 남문의 문루(門樓)인 완월루(翫月樓)에서 따온 것이기에 의미가 깊다. 달을 희롱할 정도로 경치가 좋은 곳이란 뜻인 이 정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광한루의 정경을 돋보이게 만든다.
영주각(瀛洲閣)은 광한루와 함께 신선사상 배경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축조된 상징적 누각이다.
<용성지>의 누정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라관찰사 정철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으로 하고 호중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연정을 세우고 호중에 여러 종류의 꽃을 가득 심었다.”
-- <용성지> 누정편에서
광한루
‘용성’은 옛 남원의 옛 이름이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 관찰사 정철이 주도했던 광한루 확장 공사 때 건립된 것으로 본다.
이제 광한루원을 떠난다. 만인의총을 찾아 가다가 보니 남원성이 보인다. 성이라고 하기에 너무 왜소하다. 복원이라고 하지만 너무 낮고 성 길이가 짧다. 이런 규모의 성으로 사납고 조총을 소지한 일본5만 대군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바람이 차다. 봄날 같던 날씨가 다시 서릿바람으로 변하고 있다. 마음도 차고 슬프다.
남원성의 외곽은 돌로 축조한 성이고 내부는 흙성이다. 흙성의 완만한 지형에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성이 쑥을 캐고 있다. “저 분은 이 성의 역사성을 알고 있는 분일까?”
흙에서 쑥쑥 올라온다고 쑥이라고 하지만 이 땅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잡혀갔는가. 아스라이 보이는 저 지리산은 또 얼마나 많은 한과 슬픔을 간직한 산이던가. 남원은 춘향전의 사랑이야기를 간직하고도 있지만 민족사의 굽이마다 삶과 죽음의 투쟁이 배여 있는 곳이다.
몇 사람들이 성에 올라 담소를 나누고 있어 그곳으로 가 보니 일본인들이다. 그들은 왜 이곳을 찾았을까. 아마도 정유재란 때 승전이야기를 기록하려고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사진을 찍고 열심히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있다. 저들은 얄미울 정도로 기록을 남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데 일본인이 와서 머물다 가는 남원 성터에서 가슴이 아려서 교룡산성을 바라보며 마을을 달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곳 남원성의 전투는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다. 피난가지 않고 남원성에서 싸웠던 1만 여명의 남원 백성이 모두 전사했기 때문이다. 일본군들은 죽은 이들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전승의 기념으로 가져갔다.
왜적에게 대항하여 싸우던 남원 백성들의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들려오는 듯하다.
내일이면 사월, 이 바람 속에는 1960년 사월의 혁명의 바람도 섞여 있는 듯하다. 남원 출신으로 마산상고를 다니던 김주열 학생의 죽음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4,19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주열을 마산 출신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남원이 고향이다.
남원성 전투의 상징적인 인물은 이복남 장군이다.
이복남(李福男,1555년~1597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자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그는 1597년 8월12일 군사를 대동하고 남원성에 도착한다 “ 사나이 국은을 갚을때가 이날이 아닌가“라며 죽음을 각오하고 남원성 남문으로 들어간다. 남원 성안에 있던 관민 1만 명, 병력 5천 명과 함께 고니시가 이끄는 5만6천명의 왜적과 필사항전을 벌인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자결한다. 시신은 만인의총에 안장되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구들은 사천을 지나 한 패는 함양으로 또 따른 적들은 하동을 거쳐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북진했다. 남원에서는 조선과 명나라 양국군이 합동으로 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당시 명의 부총병 명나라 장수 양원은 6월 중순부터 7월 하순까지 성벽을 증축하고 방어시설 보강에 주력한다. 구례에서 남원으로 진격하던 왜적들은 군대를 좌우 2개 대로 나누어 각각 남원성 외곽을 포위하고 조총 사격을 가했다.
왜적은 명나라 군대가 지키고 있던 남원성 남문과 서문을 돌파한 데에 이어서 동문을 점령한다. 북문을 방어하던 조선군 진영을 포위한다. 북문을 수비하던 전라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구례현감 이원춘 등은 최후의 순간이 되자, 모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그 속으로 뛰어 들어 함께 순국한다. 남원성에 오르니 죽어가던 이들의 외마디 소리가 바람이 되어 교룡산성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듯하다.
남원성
좀 더 자세하게 남원성전투를 설명하면,
1597년 7월 말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거느린 왜군 5만6천여 명이 북상하고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 4,000여 명은 남원성에서 이들을 막으려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楊元)이 부하 3,000명과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남원성을 수비하기로 했다. 8월6일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남원성에 들어오고, 8월8일 문안사 오응정(吳應井)이 들어와 방어사를 겸한다. 8월12일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申浩) 등이 남원성에 들어왔다.
8월13일 일본군 주력부대가 남원성에 당도하고 이날 밤부터 전투가 벌어져 4일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기원,이복남,임현,김경로,이원춘,신호 등 조선 장수들과 명나라 장수 이신방 등 대부분의 장수가 전사한다. 다만 명나라 장수 양원은 탈출하였으며, 8월 16일에는 남원성은 함락된다. 이 때 성을 지키던 대부분의 병사와 1만여 명 남원 백성들도 함께 전사한다. 이때 일본군들은 코를 잘라 일본 본국으로 돌아갔다. 코가 없는 시신을 본 사람들은 이때부터 애비(愛鼻)란 말이 생겨났고 전한다. 애비란 말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몇 년전 일본 교토에 갔다가 그곳에서 소위 귀무덤이란 곳을 참배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잔인한 일본군이 베어간 조선 백성들의 귀와 코로 만든 귀무덤이었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인의 코와 귀를 소금에 절이게 한 후 일본의 교토(京都)로 가져다가 묘소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코무덤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당시 왜군은 본국의 수괴에게 전과를 보고하기 위해 귀와 코만 잘라 소금에 절여 보냈다.
나중에는 귀는 두개지만 코는 하나이므로 머리 대신 코를 베어오게 했다.
왜군 1명당 코 3개씩 할당되었다.
교토박물관옆에 있는 이 무덤을 무심결에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코들은 정유재란 당시 참혹한 죽음을 당한 남원 사람들도 포함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6년간 일제의 만행과 함께 우리 민족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역사적인 실체가 될 것이다.
'만인의총' 전경
얼마 전 제14대 도공 심수관 옹이 남원을 방문하였다. 그의 14대 할아버지는 남원출신이다.
도공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그를 죽이지 않고 본국으로 호송해 갔다. 심수관 옹은 만인의총과 남원성에 들려 참배하였다. 이때 일본에 끌려간 14대 손자가 정유재란을 기억하며 자신의 선대고향을 찾아왔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복원한 남원성은 말이 없다.
통곡의 역사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겨레 역사의 눈물들이 모여 물길을 만들어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피로 물든 역사의 길이다. 이 피의 역사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다시 통곡과 시련의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원성
남원성에서 ‘만인의총’은 지척이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백성들과 군인들을 합장한 무덤이다. 이 무덤 앞에 서면 우리민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무덤을 찾는 이가 드물다. 남원의 광한루만 찾을 것이 아니다. 이곳을 참배하고민족의 길을 굽어볼 일이다.
역사적인 인물과 소설의 배경지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남원은 이렇듯 우리 역사의 축소판 같은 이야기들을 골짜기 마다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어찌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의 노봉마을을 찾아 들어가 ‘혼불’과 작가 최명희 선생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만인의총
남원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17번 국도를 타고 오르다 보면 ‘오리정’이 나온다.
이곳에서 약 3분 정도 달리다 보면 혼불문학관 이정표가 보인다. 처음 이정표로 진입하지 말고 두 번째 이정표로 진입한다. 내리막길에서 급 좌회전하여 굴다리를 지나면 이내 서도역에 도착할 수 있다. 노봉마을 가는 길 입구에 있는 서도역은 혼불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며 혼불문학의 출입문 같은 곳이다. 이곳은 강모가 전주로 통학하던 곳이다.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올 때 내렸던 역이기도 하다. ‘혼불’의 작품 배경이 되었던 노봉 마을이 나온다.
서도역은 2002년 전라선 철도 이설로 신역사가 준공되어 지금은 혼불 문학답사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역을 서성거리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봄 햇살이 퍼지는 철로 주변을 걷는다. 먼 산을 바라보면서 오래 전에 혼불을 읽던 기억을 더듬거린다.
전라선의 간이역이었던 서도역은 지금은 기차가 오지 않는다. 이곳을 서성이면서 철로에서 남원 방향을 바라본다. 산들이 이어져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다. 내 유년의 푸른 꿈들이 아직도 간이역에 서면 팔딱거린다. 산맥을 타고 햇살처럼 퍼지는 자유의 갈망과 설레임들은 나를 이곳까지 불러들였다.
서도역
서도역의 플랫폼에 앉아 몇 년 전에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쓴 소설 ‘혼불’의 소감문을 읽어보면서 이곳을 찾아온 의미를 가슴에 새길 것이다.
최명희의 소설을 대하면 어느 벌족한 가문의 종가댁 잔치마다에 들어선 것 같은 설레는 기다감과 아련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나는 곧 거기서 울을 넘는 음식 냄새와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 이어 뜨락을 메운 질펀한 흥취와 안방 여인네들의 정겨운 어우러짐, 그리고 사랑채 어른들의 경세담들을 모두 한마당에서 만난다. 고색 창연한 그 일문의 내력을 숨기고 있는 뒤꼍 대밭의 은밀스런 속삭임까지도. 최명희는 아마 그 모든 것들을 묵묵히 보고 듣고, 깊이 간직해온 그 집 마당가의 한 그루 늙은 오동나무 혹은 은행 고목인지도 모른다. 그래 끝내는 우리 삶의 참모습과 옳은 자리를 보여주는 '혼불'을 써내게 된 것인지 모른다.
--소설가 이청준
소설 ‘혼불’에는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은 단어가 많다. ‘혼불’이라는 단어도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 말이지만 지금은 사전에 추가 되었다고 한다. 소설가 최명희 선생은 혼불이란 작품명에 관해서 다음처럼 말했다.
“사전에는 없지만 제 고향 전라도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 속에는 누구한테나 있다고 하지요. 그것이 바로 혼불로 생명의 불, 정신의 불을 뜻합니다. 그러나 저는 혼불의 유무를 떠나 「역사의 혼불」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둡고 아픈 일제강점기에 혼불이 살아있는 시대를 꿈꾸는 사람들의 피맺힌 한을 그려보고자 했던 것이죠.”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입니다. 혼불을 통해 우리말 속에 깃들인 우리 혼의 무늬를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국제화다 영상시대다 들떠서 누천년의 삶이 녹아 우러난 모국어가 단순한 기호로 흩어져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워요.”
--소설가 최명희 글중에서
남원 혼불문학관
최명희 소설가는 (1947 - 1998) 소설가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 1월 1일,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면서 부터다. 그러나 그녀를 제대로 된 소설가로 사람들이 인정한 것은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으로 장편소설을 공모하여 ‘혼불’이 당선된 이후가 될 것이다. ‘혼불’의 당선은 그녀를 작가로 인정하는 토대를 확실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른 작가와 달랐다. 당선의 기쁨과 영광도 잠시 그가 평생 풀어야 할 숙제를 숙명처럼 느낀다. 이 숙제는 다른 사람이 내 준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내고 스스로 짊어진 숙제였다.
이 숙제는 숙명이었다. 남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가슴이 울렁거려서 주체할 수 없던 그의 의지의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그때까지 다 쓰지 못했던 소설 혼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바램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당시에 그는 한 세대인 30년을 원고지 2,000매로 담아 내려했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10년을 담기에도 부족한 지면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녀를 누르고 있던 사무치는 가슴 속에 가득 담아 두었던 이야기와 환청처럼 들려오던 조상들의 목소리가 인도한 길이었을 터이다.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어 날아 갈 것 같은 회오리바람이 그를 주체할 수 없는 벌판으로 몰고 가서는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망의 나날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고향이며 그가 유년 시절 자주 찾아갔던 고봉마을에 주목했다. 시대는 1930년대로 정한다.
암담하고 절대빈곤이 온 우리 국토를 억누르던 1930년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가 되어 버린 조국의 마을들은 여전히 조선말의 정신구조와 문화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런 이중적 시대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절망, 분노, 사랑, 시기와 희망의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삶을 원고지에 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녀가 ‘혼불’에 심혈을 기울이던 17년 동안 그는 처절하고 고독하게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누에가 명주실을 뿜어 내 듯 자신의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그의 삶은 ‘혼불’을 쓰는데 바쳐진다.
1930년대 전북 남원의 한 마을의 문중에서 유서 깊은 전통과 경제적 토대가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며 치열하게 종가를 지키려는 종부(宗婦) 3대와, 인근의 가난한 농민들의 삶과 죽음, 사랑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80년 4월부터다. 1997년에 10권으로 원고를 종료할 때까지 만 17년이 걸렸다.
혼불은 1990년 12월, 제1부 ‘흔들리는 바람’ 1,2권과 제2부 ‘평토제’ 3,4권으로 모두 네 권에 이어 1997년 5부 전10권으로 출간된다.
1983년 초판 된 혼불 초간본은 혼불 제1부에 해당된다. 이 때 쓴 최명희 선생의 후기를 읽으며 가슴이 울렁이는 측은함에 억장을 아리게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작가로서의 그녀의 심정을 그대로 옮겨 요약해서 적어본다.
'노봉서원' 터가 있는 종가집전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는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었다.
나는 마치 한 사람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
그것은 휘몰이 같았다.
지금 이토록, 한 시대와 한 가문과 거기 거멍굴 사람들의 쓰라린 혼불들은 저희끼리 스스로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으니, 나는 아마도 그 불길이 소진하여 사윌 때까지, 충실하게 쓰는 심부름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다 못한 이야기를 뒤쫓느라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 일을 위하여 천군만마가 아니어도 좋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오래오래 나의 하는 일을 지켜보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 눈길이 바로 나의 울타리인 것을 나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동구밖의 해묵은 장승처럼 오직 한 자리에 붙박히어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사로잡힌 큰칼을 목에 쓰고 서럽게, 홀로.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느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만 있다면.
-- 소설가 최명희 혼불(1983년판) 동아일보 간행 후기중에서
혼불문학관 입구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민족성은 퇴락한다. 결국 우리의 전통문화는 스러져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알 수 없는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서리치며 아늑하고 포근한 고샅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역사의 뒤안길을 걷다보면 최명희 선생이 걷고자 했던 길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진정으로 자신을 찾으면서 조상들의 삶을 조명하려고 했다.
마치 그의 임무는 민족혼과 한국의 삶과 의식을 복원하며 혼불을 붙인다.
시대 배경인 1930년대는 우리 민족의 생명인 혼불을 빼앗긴 절망의 시대였다. 혼불은 이 어둡고 고통과 고난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혼불은 몸속에서 타고 있는 불덩어리이다.
혼불은 사람이 죽기 직전에 몸에서 빠져 나간다고 한다. 목숨의 불, 정신의 불이 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최명희 작가의 ‘혼불’의 문학 기행은 우리 민족의 핵인 역사와 정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소설 ‘혼불’의 배경은 남원은 절개와 저항의 고장이다. 지리산과 만인의총에서 보여주는 극난극복의 장소가 있으며 춘향전 흥부전 변강쇠가 만복사저포기 같은 고전문학의 산실이기도 한 곳이다. 또한 동학혁명과 국악의 성지가 된 곳이며 도자기를 만들던 조공들이 정유재란때 일본에 끌려가기도 했던 혁명과 예술의 고장이다.
이런 남원은 혼불이 쓰여 질 수 있는 토대인 상징성, 대표성, 역사성을 간직한 곳이다. 최명희 작가는 유년 시절의 어느 추석날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찾아 갔던 노봉마을을 방문한다. 비가 내린 날 온통 진흙탕 길에 어린 최명희는 불만을 터트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런 딸을 노봉마을 주변의 산과 들을 가리키며 혼을 내주었다.
“이 동네가 얼마나 좋은 곳인데, 이 길로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다니셨다. 온 조선 강토를 다 다녀도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소설가 최명희 아버지 말 인용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이야기 속에는 조선왕조가 망했지만 절망하지 않고 새 날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갔던 한 세대 앞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년 시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녀가 생전에 말했던 이 말은 이것을 증명한다.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를 있게 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윗대로 이어지는 세보의 사다리가 저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죠.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음식을 먹으며 살았을까. 이 평범하고 소박한 의문이 저를 17년간 붙들어 맨 근거가 된 것입니다.”
--소설가 최명희 글중에서
종가집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그녀는 조상들이 살았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헌신을 다했다. 혼불은 1930년대 남원 매안 이씨 집안의 삼대 종부(宗婦)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지금은 삭녕 최씨 종가댁이 된 집은 노봉마을 맨 꼭대기에 위치한다.
종가집을 가기 위해 고샅길을 걸으면서 1983년 동아일보사에서 펴낸 푸른 글씨의 <魂불>제목이 떠올랐다. 군대생활에서 오는 긴장과 이 책을 읽을 때 긴장감 중에 오히려 혼불을 읽으며 느끼던 전율이 더 크기만 했었다.
1983년 여름, 나는 당시 대대의 고참 군종병이면서 부대의 책을 관리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간과 친숙해 질 수 있었다. 퍽 두꺼웠던 소설 속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소설 첫 페이지의 대바람 소리의 표현력이었다. 이 표현은 흉내를 내기도 쉽지 않기에 옛 책을 펴놓고 그대로 옮겨 본다.
별밭이 고른 날에는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었다.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듯 말듯 사운거리다가도,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그래서, 울타리 삼아 뒤란에 우거져 있는 대밭이나, 고샅에 저절로커 오르는 시누대, 그리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왕대잎의 대바람 소리는,그저 언제나 물결처럼 이 대실을 적시고 있었다.
--소설 혼불 인용
혼불의 시작은 댓잎 소리로 시작을 한다. 이 표현력에 나는 그 긴장된 군대 조직 속에서도 시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서도역을 지나 노봉마을로 들어선다. 노적봉이 보인다. 그래서 노봉마을이다.
먼저 언덕빼기 고샅길을 올라 혼불 속의 매안 이씨 종가댁을 찾는다. 실제는 삭녕 최씨의 종가댁이다.
솟을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담을 힐끔거리며 보면서 인적이 있나 확인해 보지만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강모와 결혼하였던 효원이 고독하게 살아가며 걸었을 뒤란에는 늙은 매화가 만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가상이며 소설이기에 그냥 혼자 상상할 뿐이다. 삭녕 최씨 고가의 뒷터는 노봉서원 자리이다. 노봉서원은 대원군 서월 철패로 무너진 후 빈터만 남아있다. 이 노봉서원이 복원된다면 새로운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멀리로 서도역과 인하리 거멍골이 아련하게 보인다.
오랫동안 이 종가댁 주변을 서성거리다 보니 청상의 몸으로 소멸되어가던 이씨 집안을 살아 일으켜 세우던 청암부인의 삶의 모습들이 푸른 댓잎의 흔들림으로 살아옴을 느낀다. 이 종가댁은 몇 년전에 안채가 소실되었다. 그래서 인지 대문은 굳게 잠겨 있어 외부인을 달가와 하지 않는 눈치다. 종가댁의 오른쪽 담을 따라 난 길을 걷는다. 오를수록 전망이 좋아 진다. 담 넘어 에서 안채가 사라진 종가집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마구 누른다. 그리고 율촌댁의 허약함이 묻어나고 강모가 태어났음직한 장소를 바라본다. 혼불에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서선(西山) 노적봉(露積峰)을 등뒤에 병풍같이 둘러 세우고 멀리 아득한 동쪽으로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마을 매안의 지형은,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산 노적봉의 기맥이 아래로 벋어 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면서 평평한 둔덕을 짓고 고이는데, 그 자락 끝에 나붓이 드러난 발등과 같이 도도록하다. 그냥 뒷동산이라고도 불리는 산 자락 기슭에는 해묵은 밤나무가 들어차 우뚝하거나 드러누운 바위의 큰 덩어리들과 어우러져 동무를 하고 있는데, 이 밤나무 숲은 뒤안으로 한 원뜸이 마을의 맨 위쪽이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암수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종가의 솟을대문 아래쪽으로 형제, 지친과 그 붙이의 집들이 모여 있다.
-- 소설 혼불 인용
종가집 뒤안길
밤나무 몇그루는 보이는데 아무리 찾아도 은행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작은 은행나무는 몇그루 보인다.
약간은 물안개가 끼었지만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노봉서원 터에서 동네 고샅길과 마을을 내려다본다. 혼불문학관과 청호저수지는 산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노봉서원 터 위에 만발한 매화 밭을 걸었다. 늦 매화가 만발하여 향기가 좋다. 산길을 오르면서 옹골네와 춘복이, 당골네인 백단이 같은 등장인물들을 생각한다. 이 마을 숲 언저리에는 강모와 사촌 여동생이었던 강실이와의 사랑의 흔적들이 묻어 있는 아픈 사연들이 스멀거린다. 혼불에서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인물은 강실이의 처절하고 슬픈 운명이었다.
사촌 오빠 강모와의 애틋하고 살폿하지만 건너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어서 가파른 벼랑으로 내몰린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남성으로서 연약하고 무능한 강모는 술집 기생 오유끼와 함께 중국 만주의 봉천땅으로 도피를 한다. 그들이 떠나갔을 길들이 아련하다. 홀로 남은 강실이는 강모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처절한 고독으로 청춘을 삭인다. 강모와의 정사 소문이 거멍굴로 바람에 꽃씨 나르듯 날아가서 퍼지기 시작한다. 이에 춘복이가 양반댁 강실이를 탐내기 시작한다. 이런 춘복이와 남 몰래 동거를 하던 옹구네도 양반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옹구네는 강실이가 강모와 정사를 치뤘다는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한다.
옹구네가 퍼뜨린 소문은 산불처럼 타들어 갔다 .강실이와 효원은 어디로 떠날 수 없는 처지의 여인이다.이즈음 춘복이는 강실이를 겁간해 임신을 시킨다.
자신의 남편인 강모와 강실이의 정사 사실을 알게된 효원은 애증에 절망하면서 강실이를 먼 곳으로 떠나 보내려 한다. 그러나 옹구네는 강실이를 납치한다.
이 무렵 이씨 문중의 노비인 침모 우례에게 상전의 피가 흐르는 아들 봉출이는 성장해 간다. 청암부인의 묘에 몰래 묘를 썼다가 덕석말이를 당한 당골네의 원한은 무서운 또아리를 틀고 비극의 씨앗을 키우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도 그렇게 엄청난 갈등의 비극들이 숨어서 꿈틀거린 곳이었음을 생각한다. 소설이 허구라고 하더라도 혼불은 사실같은 착각을 하기에 이른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당시 까지 남아 있던 양반과 상민의 계급적 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이 고샅을 걸어 올라오는 듯하다. 강모의 사촌형들인 강호와 강태이다. 사람들의 갈등의 씨줄과 날줄이 소설 혼불에는 촘촘히 짜여서 생시처럼 살아서 다가서기에 이른다.
그는 이런 삶과 죽음 갈등속의 갈피마다 정성을 기울여 당시의 우리 풍속들을 아름답고 정교하고 정갈하게 표현한다.
혼례의식을 시작으로 연(鳶) 이야기와 청암부인의 장례절차 그리고 유자광이나 조광조에 얽힌 사화이야기와 '새로 쓰는 백제사'에는 그의 역사관이 숨겨져 있다.
이런 서술을 능가하는 조왕신의 습속이나 복식에 대한 묘사, 윷점이야기 같은 내방의 섬세한 면면들을 어찌 내 필설로 감당하겠는가. 이런 묘사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독서와 자료를 읽었을까 생각하니 그녀가 존경스러워진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그녀의 정성에 글을 쓰는 행위가 다시 부담으로 다가선다.
청호저수지
노봉 마을 고샅길을 내려와 혼불문학관으로 향한다. 햇살에 눈이 부시다. 거대한 한옥으로 건축한 혼불문학관은 그 미관이 수려하다.
내부 전시실의 최명희 선생이 살아 생전 아끼며 사용했던 만년필, 커피잔, 혼불 원고 등을 비롯한 소장품류를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매안 이씨 가문 종부 3대의 삶을 통해 나타난 당시의 풍습이 재현되어 있다.
전시실에서 발을 옮길 때마다 순결한 모국어와 세시풍속, 관혼상제 등 전통생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될 것이다.
최명희 선생은 혼불을 지적인 머리로 ‘혼불’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불사르듯 불타는 가슴을 인내하면서 작품을 썼다. 최명희 작가는 생전에 혼불의 집필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장편이 무서워 읽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용기를 낼 일이다. 이 글을 읽으면 절로 가슴을 저미게 되기 때문이다.
“제 작품의 한부분을 따로 떼어 내거나, 나아가 한문장만 읽어도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도록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에도 머뭇거렸다. 이는 인간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우리 삶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한번 쓰기 시작하자 저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사로잡은 이 작품 때문에 밤이면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했다.”
--소설가 최명희 글 인용
살구나무 꽃이 피는 계절에는 늘 유년의 그리움이 몽실거린다. 매화와 벚꽃이 없었던 내 고향 마을에는 이즈막 늘 살구나무 꽃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노봉마을에는 푸른 댓잎이 서걱거리며 흔들리고 늦 매화가 바람에 휘날린다.
혼불문학관 앞 청호저수지는 공사로 물이 말랐다. 청암부인이 조성한 이 저수지는 혼불을 읽은 사람이면 그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1930년 저 참담한 일제하의 삶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 마을에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사람들이 나고 죽어간 마을에는 한 작가의 인연으로 문학의 마을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문학의 힘이 위대함을 느끼는 순간 다시 최명희 선생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혼불을 완성하고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러나 결코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다. 혼불로 살아났고 그 불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 겨레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글과 얼이 살아 있는 동안 최명희 선생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하라 혼불이여.
[스크랩] 김 용택시인과 임실-하 (0) | 2009.10.09 |
---|---|
[스크랩] 김 용택시인과 임실-상 (0) | 2009.10.09 |
[스크랩] 흔들거리며 피는 꽃(도종환) (0) | 2009.09.23 |
[스크랩] 마음의 수수밭 (0) | 2009.09.16 |
[스크랩] 기다리는 행복 / 이해인 (0) | 2009.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