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전 11시 30분, 경주 진평왕릉 주차장에서 정우를 만났다. 삼릉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 난 뒤,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의 경주 둘러보기라서 그런지 자못 기대가 크다. 늦가을의 단풍이나마 경주에서는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레임이 작용한 이유일 것 같다.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힐링공간'으로서의 삼릉 주변의 소나무 숲, 경주 시민은 물론 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공간이다. 경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명소 중 하나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박씨 3왕의 능인 '삼릉', 1971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 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3왕의 능으로 전하고 있다. 2002년 어느 봄날 저녁, 술에 취한 나머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능의 맨위에 올라가 잠시 가부좌로 앉아있던 적이 있었음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신라 왕릉에 관심이 많아서 틈나는 대로 경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왕릉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교장으로 정년 퇴임한 친구인 정우와 자유로운 영혼의 평교사로 살아온 나는 특별한 인연이 있어 지금도 늘 그 깊은 인연으로 종종 만나고 있다. 정치적 성향이 조금 달라서 가치관의 충돌이 간혹 있긴 하지만 깊은 우정에 상처날 정도는 아니라서 그러려니 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지낸다. 친구와 나는 대학 시절 야학활동을 함께 하면서 좋은 추억을 쌓았고 오랜 세월 모임을 같이하면서 살아왔다.
경주 남산 주변에는 가을바람이 선선했다. 여기저기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불그스레 물든 단풍의 빛깔이 그나마 선명해서 참 좋다. 마지막까지 그 싱싱함을 유지할수 있기를 기대한다.
단풍잎을 깔고 앉아 본다. 짚방석과 다를 바 없다. 자연과 합일되는 물아일체, 물심일여의 순간이다. 이런 풍류를 누려보는 낭만이 아직은 마음 속에 남아있음에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한석봉의 시조가 떠오른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온다. 아해야, 박주산챌망정 없다말고 내어라."
배리 삼존여래석불입상, 보물 제63호다. 조각 솜씨가 뛰어나며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움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표현하고 있다.(인터넷 자료 인용)
경주읍성의 일부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읍성이지만 최근 복원되어 그 명맥을 잇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친구가 자주 간다는 두부요리 전문점, 멀리서 온 나를 위해 특별히 안내한 곳이다.
맛집으로 소문난 탓인지 식당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워낙 맛있고 유명해서 줄을 서서 음식을 기다려야 할 정도라고 하니 오죽할까?
친구의 제안에 따라 점심식사를 하고 황성공원 솔숲으로 이동, 호젓한 이 길을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자신과는 생각을 좀 달리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안타까운지 자신의 생각을 자주 이야기했다. 뭔가 설득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서로 정치적 견해가 다름을 이미 잘 아는 친구일텐데 더이상 하지 않는게 좋으련만.....
경험한 바에 의하면 종교와 정치에 관한 얘기는 참으로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해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이다. 설득조로 자꾸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미 굳어진 생각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설득이 지나치다 보면 의가 상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는 거다. '정우야, 너의 정치적 견해를 존중한다. 너도 나를 존중해 주었으면 해. 네 말을 들어보니 생각하는 방향이 나와 달라서 더 이상의 긴 이야기는 곤란해. 우리 서로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자.' 이렇게 말하고 싶은 내 마음을 친구는 잘 몰라주는 것 같다.
맥문동은 음지식물이라 그늘에서도 잘 자란다. 솔숲의 그늘에 잘 어울리는지 지자체별로 이런 식으로 꾸며놓은 곳이 많은 것 같다. 친구는 이렇게 의도적인 공원관리보다는 자연스레 모든 풀들이 자랄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얘기했다. 나도 동의했다. '똑같은 것보다는 다 다른 것'이 좋은 것이니까.
황성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계단을 딛고 한참을 올라보니 주변의 나무들이 눈아래 보인다.
신라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황성공원 중앙 제일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나라에 충성을, 부모에게 효도를'의 구호가 중시되던 시절, 다시 말해 충효 사상이 이 땅의 지배이데올로기로 팽배해 있던 때에 이런 동상이나 충혼탑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세워졌던 것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친구는 퇴임하면서 남촌이란 동네에 이렇게 멋지고 좋은 집을 지었고, 이곳에서 농사짓기, 맨발걷기, 악기 배우기 등 취미생활은 물론 건강관리를 하면서 늘그막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가. 60대야말로 인생의 전성기가 아닐까? 아무쪼록 우리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후반기를 멋지게 보내 보자우.^^
친구는 저 창문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자주 카톡에 올려서 보여주곤 했다. 특히 저녁노을이 아름다울 때는 그 감격을 혼자 즐길 수 없다면서 친구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유하곤 했다. 오늘은 나를 이곳으로 초대하여 정성껏 과일을 깎고, 직접 커피를 내려서 내 놓는다. 친구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내인 옥희씨는 이웃집에서 잠시 놀러갔다고 하는데 곧 나를 보러 올거라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참으로 멋지게 살고 있는 부부다. 늘 보기에 좋았고 둘 사이에 내가 잠시 깃들어 있다 보면 저절로 미소가 번지게 됨을 느낀다.
함께 어울리다 보니 어느덧 오후 4시가 넘었다. 포항에 가서 윤규 형을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친구와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조만간 또 만나기로 하고 둘만의 사진을 한 장 더 남기고 포항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경주 포항 간의 산업도로, 참으로 오랜만에 달려본다. 포항에서 경주에 있는 직장까지 4년 정도 통근을 한 바 있는데 그 때는 매일매일 다녔던 길 아닌가! 안강 부근을 지날 때쯤 무지개가 하나 떠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윤규 형은 오늘 경북 역사교사 모임에 참여한 10여 명을 교사들을 인솔해서 장기읍성과 그 주변에 대한 문화 해설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오후 4시경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 뒤, 나와의 시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리나케 포항 시내로 차를 몰고 오고 있다면서 전화를 했다. 내가 도착해야 할 주소를 알려 주면서 내비 찍고 그곳을 찾아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다. 도로명 주소 755-7을 찾아가니 멋진 농막이 하나 서 있었다. 잠시 후 형님도 도착해서 거의 기다리지 않고 농막(고전 번역을 위한 연구실)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위 사진은 농막 앞에서 찍은 것이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의 풍광을 한번 둘러보는 게 좋지 않겠냐면서 산책삼아 길을 나섰다.
이런 길을 따라 2킬로미터 정도를 걷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단다. 인적이 거의 없는 길, 이곳을 천천히 오가다 보면 거의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다. 한 바퀴만으로 아쉬워서 윤규형은 두 바퀴 정도를 걷는다고 했다. 윤규 형은 오랫동안 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 교수로 근무하다가 올해 초 정년퇴임을 하고 2년 전 지었던 이곳 농막에서 여러 명의 연구원들과 함께 고전 번역작업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평생 동안 소장했던 엄청난 양의 책, 귀한 희귀본과 자료적 가치가 큰 장서까지 모두 도서관에 기증했다고 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결정일 것이다. 그러나 정년퇴임에 즈음하여 모든 것을 툴툴 털어버리고 마는 비움의 철학, 그 정신적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세속적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윤규 형님의 그 초월적 정신세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조금 전 내가 차를 몰고 오면서 무지개가 뜬 것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었듯이 윤규 형도 "야, 무지개다." 하면서 연못가에 뜬 무지개를 향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좀처럼 보기드문 현상인지라 무지개와 함께하는 기념 사진 하나 정도는 남길 법하다. 못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갖다 놓은 벤치와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잘 어울린다. 윤규 형이 산책하다가 종종 앉아 쉬는 곳이 아닐까 싶다.
이 못가에서는 주상절리를 관찰할 수 있어서 좋다. 이 둑은 조선 숙종 때 처음 만들어졌고 언젠가 원래 있던 둑을 더 높여 쌓았다고 한다.
비를 맞으면서 연못을 한 바퀴 돌고나서 윤규 형과 나는 자명마을에 있는 **한우 식당에서 불고기 정식으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차를 마실 겸해서 농막으로 다시 돌아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포항시내에 있는 모든 선정비를 찾아내서 번역했던 작업과 그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 청소년 자유학교에 얽힌 이야기, 연구원들과의 공부 이야기, 텃밭농사 이야기 등 형님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거침이 없었고 흥미로웠다.
형님과는 기회 있을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8시 경 덕천 이*호 선생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를 찾았다. 두호동에 위치한 모 당구장이었는데 거기서 덕천과 도산을 만나 잠시 당구를 치면서 어울렸다. 다시 술자리로 이동, 후배 성*호 교장을 불러내어 자정 무렵까지 소주를 한잔씩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성 교장은 몸이 안 좋은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도산과 내가 4병의 소주를 부지불식간에 다 마셨다. 말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아 조금 취했던 것 같다.
덕천 선생은 자신의 집에다 나의 하룻밤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가장 꼭대기 층이라서 밖을 내다보는 전망이 좋아 사진 한 장을 찍어 두었다. 몇년 전 포항의 불꽃놀이 장면을 이 장소에서 구인회 회원들과 함께 실감나게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의 두 책은 덕천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다소 철학적 사고를 요하는 책을 좋아하는 덕천이다. 내가 요즘 재미있게 읽은 책도 소개해 줬다. 김주혜의 <작은땅의 야수들>,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에 빛나는.....
덕천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장성동 모 목욕탕으로 가려는데, 엊저녁에 잠시 전화로 연락이 되었던 극단 선배 김*종 선생의 전화가 온다.
"형님, 어디 있어요? 아침에 만나서 해장국이나 한 그릇 합시다."
"고마워요. 목욕 끝내고 나오면서 연락할 테니 기다리라우."
김 선생은 30여년 전, 90년대 초 극단 '형영'에서 만났다. 나보다 나이는 두세 살 젊어도 극단의 선배다. 그는 '형영' 극단이 1992년 창단될 때부터 활동했지만 나는 1년 뒤에 입단했으니까 극단 선배임에 틀림없고, 자신을 그렇게 불러달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그간 동고동락하면서 연극 공연을 함께한 인연이 깊은지라 언제 보아도 반가운 사람이다. 그는 양덕동 소재 '어림지'라는 해장국 집에서 만나 덕천과 나에게 선지해장국을 사 주었다.
극단 선배는 나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다. 극단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을 나에게 건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귀한 선물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아래 사진에서 날 찾아보면 '와, 저런 시절도 있었나 싶을 것 같다. 아, 옛날이여!!!'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천승세 선생님과 함께 찍은 윤규 형(왼쪽)의 모습, 지금 보니 참으로 앳된 모습이다. '형영' 극단에서 천승세의 <만선>을 공연할 때 초청한 작가의 모습인데 이미 그는 2020년 11월 27일 향년 81세로 돌아가셨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네 명의 동기(무호, 상춘, 기호, 중주)들과 당구를 또 즐겼다. 어제 이어 이틀째 연속으로 치게 되었지만 평소에 자주 즐기지 않는 이유로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함께한 친구들은 모두 퇴임을 해서 백수지만 현직에 있을 때는 다들 능력있는 교장으로 열심히 살았던 친구들이다. 무호는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술 한잔 더하고 하룻밤 더 묵고 가라면서 날 붙잡았지만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구미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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