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연출 이권주
무대는 어느 허름한 술집, 두 명의 남녀(A,B)가 앉아 있고, A의 선배인 C도 가까이 앉아서 서로에게 막걸리 잔을 따르고 있다. 여인 D는 떨어져 앉은 자리에서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술집 주인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준다. 등장인물 A, B, C는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시낭송 모임의 회원인 것 같은데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야기와 함께 상황에 걸맞는 시를 한 편씩 자연스레 낭송하는 분위기이다.
** 등장 인물(6명)
A: 기업 컨설턴트
B: 원예치료사, 숲해설사
C: 전직 교사
D: 포장마차 주인
E: 시낭송가 1
F: 시낭송가 2
암전 상태에서 잔잔한 음악(포레 파반느)이 흐르다가 조명이 들어오면 무대에는 술집 분위기가 연출된다. 무대 뒤의 스크린에 비춰서 그 분위기를 표현하는 방식도 좋다. 먼저 술집 주인인 D가 하던 일을 멈추고 시를 하나 천천히 낭송하면서 시작한다.
한글 공부(박후불)
어릴 적/ 산골짝에 남자 아이들/ 학교 보내주고/ 여자들은 공부하면 남의 집에 간다고/ 보내주지 않았다/ 남동생 둘은 학교 가고/ 늦게 언니들은 서당에 갔다. 나는 소꼴 베러 다니고/ 조금 베면 아버지가 쫓아냈다/ 마을회관 한글공부/ 내 눈을 뜨게 하고/ 흐리게 보였던 간판이/ 환하게 보인다/ (시를 다 낭송하고 나서 감개무량한 듯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인다.)
C: (놀란듯이) 사장님, 방금 읊은 시는 무언가 사연이 있는 거 같은데….맞죠? 아닌가요?(D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A: (술잔을 들면서 C에게 조용한 말로) 형님, 그런 거 자꾸 묻는 거 아니에요. (분위기 전환) 자, 막걸리 한 잔 하셔요.
C: (술잔을 받으며) 저 사장님은 오뚝이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분이야.
A: 형님은 어떻게 그리 잘 아셔요?
C: 이 사람아, 내가 이 술집 단골이잖아. 자주 들르다 보니까 사장님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됐지. 친누님 같아서 정말 좋아. (A와 B를 번갈아 바라보며) 내가 고민이 좀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
B: (웃으면서) 선배님도 고민이 있으세요?
C: 요즘처럼 힘든 때에 과연 고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B: 그렇긴 합니다만.
C: (한숨을 쉰다) 자꾸 눈에 밟히는 친구가 하나 있어. 한 때는 사업이 잘 돼서 걱정없이 살았는데 언제부턴가 잘 안 풀리는 거야. 옹골차게 계획을 세워서 추진했던 일이 그만.... 벌어놓은 돈 몽땅 다 투자했는데 거덜이 났다 이거야. 어쩌면 좋겠냐구?
A: 친구를 걱정해 주는 형님의 마음이 감동입니다. 알다시피 저도 조그만 회사를 한 20여 년 운영해 왔잖아요. 그간 돈도 좀 벌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정말 힘드네요. 날이 갈수록 더한 것 같아서 이래저래 참 갈등이 많습니다. (B와 C도 안 됐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B: 선배님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자, 한잔 하세요.(세 명이 술잔을 든다. 떨어져 있는 D를 의식한 듯) 사장님도 한 잔 받으시죠?
D: (손사래를 치며) 에이, 나는 술은 조금도 못마셔. 어서 드셔.(A, B, C가 잔을 부딪치며 한잔을 기울인다.)
B: (A와 C를 번갈아 보면서) 선배님들, 제 직업이 뭔지 아시죠?
A: 원예치료사 아냐?
C: 숲 해설가잖아?
B: 두 분 말씀이 다 맞아요. 비교적 재미있는 직업이긴 한데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못해요.
A: (고개를 갸우뚱하며) 왜 그렇지?
B: 해마다 여러 업체들이 사업권을 따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해요. 제가 소속된 업체가 입찰이 안되면 그나마 일자리도 없어지지요. 일자리가 별로 없는데다가 전문가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서 저도 언제까지 일할지 걱정이 많습니다.(한숨을 쉰다.)
C: 그래? 우리 후배는 늘 표정이 밝아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교편을 잡았던 나도 퇴임한 뒤에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그리 쉽지 않더라구….좀 그랬어. 어떻게 하면 다들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A: (생각난 듯) 푸닥거리라도 한 번 할까요?
C: 푸닥거리를 한다?
B: 이 기회에 직업을 바꿔 볼까요?
C: 직업까지 바꾼다고? ㅎㅎ 차라리 산속으로 들어가서 숨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D (술집주인은 A,B,C의 얘기를 차례로 다 듣더니 강한 어조로) 어허,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약해서 되겠어? 나이 80 넘은 할매들도 한글 배우고 시인이 돼서 영화배우로 나오는 거 못 봤냐구? 다큐멘타리 영화, 거 뭣이냐, <칠곡 가시나들>말이여. 할매들이 쓴 시, 비록 짧지만 가슴에 불을 지르지 않더냐구. 한번 같이 들어볼까? (A, B, C 모두 좋다는 반응을 보이고 조명이 잠시 아웃된다. 음악과 함께 다시 무대 오른쪽에 조명 들어오면 대기하고 있던 E가 낭송을 시작한다.)
E: 동훈이 아부지요(문식이)
동훈이 아부지요, 33년만에 불러 봅니다/ 거기가 얼마나 좋길래/ 철부지 5남매 남겨두고/ 먼저 가서 좋은교/ 깻잎농사 지어가메 고생한 덕에/ 자식들은 장성하여 제 짝들 찾아/ 지들 밥벌이는 하고 사니/ 이만하면 잘 있지요//
D: (귓속말 어조로) 어때? 또 들어 봐유.
E: 시가 뭐고? (소화자)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 시를 쓰라 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조명 켜졌다가 켜지면)
D: 한 편만 더 들어봐유.
E: 사랑(박월선)
사랑이라카이/ 부끄럽따/ 내 사랑도/ 모르고 사라따/ 절믈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그래도 뽀뽀는 안 해밧다//
(조명 꺼지면 E 퇴장, 곧 조명 들어온다)
D: (혼잣말로) 크크 뽀뽀는 안 해봤대. 거짓말, (두 남녀를 보면서) 재미있지? 할매들이 쓴 시도 이렇게 감동을 주는데, 형편이 좀 어렵다고 해서 그렇게 약해빠져서 되겠어? (꾸지람하듯) 다들 정신차려!
A: (웃으면서) 우리 사장님 멋쟁이!
B: (웃으면서) 사장님이 최곱니다.
C: (웃으면서) 누님께서 오늘, 말문이 터지셨어. 하는 말씀이 다 옳아요. (엄지척을 하며) 훌륭하십니다. (두 후배를 보면서) 우리 사장님께서는 시낭송을 참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대단하신 분이야.
D: 어찌 나를 그렇게 잘 아는 겨? 좋아, 한 편 더 들어 보자.
(대사 끝나면 음악-베토벤 비창 2악장-과 함께 무대 오른쪽에 조명, F는 나태주의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낭송한다.)
F: 그럼에도 불구하고(나태주)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 것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이유이다// (낭송이 끝나면 조명 아웃, F 퇴장하면 곧 조명 인)
-열림원,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2022)
D: 이 선생, 지금 낭송한 시 잘 들었지? 들은 소감을 말해 봐유.
C: 소감을 말하라구요? (잠시 생각한 뒤에) 누군가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크게 위로 받은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구요. 고달픈 현실과 기다리는 소망 사이를 연결해 주고 있는 듯한 작품이어서 아주 맘에 듭니다. 좋아요.(엄지척을 한다. A와 B를 번갈아 보면서) 우리도 누군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시를 이 자리에서 낭송해 보는 게 어떨까?
A: 위로해 줄 수 있는 시라구요?
C: 그렇지, 누가 한번 해 볼까?
B: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사이, A와 C 각자 반응을 보인다.) 저는 직업상 자연과 호흡하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러다 좋아하게 된 시가 하나 있습니다. 들려드릴게요.(천천히 일어선다)
음악,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 나무 학교(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 문정희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1916)
A: 나이가 들면서 나무한테 배울 게 있다는 시인의 그 겸손함이 가슴을 때리는데요.
C: 전체적으로 삶에 대한 진지한 깨달음이 잘 녹아 있는 거 같지 않나? 낭송도 좋고 내용도 아주 좋았어.
B: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우리 모두를 위하여, 화이팅!
C: 화이팅? 이왕이면 우리말을 써야 안 될까?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께서 가르쳐 준 말이 있네. '아리아리', 따라 해 봐.(따라서 한다.) 좋아. 앞으로는 '화이팅' 말고 '아리아리'라는 말을 쓰는 거야. (관객석을 향한다.) 여러분들도 잘 아셨죠? 따라 해 보세요. 아리아리! (관객들 상당수가 따라한다. 다시 시선을 무대로 옮겨서) 처음 쓸 때는 어색할지 몰라도 자주 쓰다보면 좋아질 거야. 우리말 살리기 차원에서도 꼭 필요하지 않겠어?
B: 네, 알겠습니다. (사이) 선배님들도 시낭송 해 주셔야죠. 아리아리!
C: 바로 써 먹는구먼. 좋아좋아. 몇 년 전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던 시인데, 한번 들으면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보자구. 후배, 같이 낭송해 볼까?(자리에서 일어나면 음악-아웃 오브 아프리카 OST-이 흐른다. E와 F도 등장, 무대 위의 모든 배우들은 관객석을 향한다.)
* 희망가(문병란)
C: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A: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 지식을만드는지식 육필시집, <법성포 여자>(2012)
A, B, C: (3명이 합송한다.) 꿈꾸는 자여,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한 고비 지나면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C의 시낭송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의 배우들은 각자 관객을 향해 적절한 시기에 일어선다. 시극이 곧 끝나게 됨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희망가의 뒷부분은 모두가 함께 낭송함으로써 마무리의 극적인 효과를 살리면 좋다. 낭송이 모두 끝나면 무대 전체 서서히 어두워지고 클로징 음악이 한동안 흐를 때, 자막에 '꿈꾸는 자여,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한 고비 지나면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라는 문구가 한동안 보이다가 차츰 사라진다. 조명 밝아지면 모두 무대 앞으로 나와서 관객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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