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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느 소설가

옛날에 옛날에

by 우람별(논강) 2009. 8. 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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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시간
불현듯 정병윤 선생님 생각이 나서
손전화를 걸었더니 반갑게 받았다.

"날도 칙칙한데 칼국시 한 그릇 하시더"
"좋-지, 기다릴께"

담장이 헐린 서라벌 문화회관 옆에
차를 대기하고 있으니 특유의 뒤뚱거리는 폼으로
하얀 바탕에 '건천'이란 검은 글씨가 선명한
야구 선수 모자를 눌러쓰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걸어 나왔다.

삼릉 아래 우리밀 칼국수집을 찾았다.
언제 가 봐도 사람들이 바글대는 곳,
건물 밖 평상을 차지하고 앉아
칼국수 두 그릇에 공기밥 하나를 주문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금방 음식이 나왔다.
출출하던 터라 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딱 먹어 치우고 선배가 다 들기만을 기다렸다.
간간이 이것저것 물으면서 음식 들기를 방해했다.
"요즘 어떤 작품을 쓰고 계셔요?"
"고엽제 문제를 다룬 - - - - - -"
(소설제목:'선임, 노을로 지다')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시는가요?"
"컵라면 삶아 먹으면 돼,
오늘 같은 날은 포식하는 날이제."
칼국수 한 그릇 대접하면서 생색내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엔 미안함이 더 앞선다.

저 마당 한쪽 귀퉁이에서는
80쯤 되어뵈는 허리굽은 할매가
호박잎을 정성스레 다듬고 계셨다.
좌판엔 깻잎 묶은 것도 가지런히 놓여있다.
지나가는 손님들이 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다가가서 값을 물어본 다음 필요한 만큼 샀다.
거스름돈을 내 주기 위해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는데 제법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1,000원짜리를 10개씩 가리런히 싼 것이 몇 묶음,
알뜰함의 정도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침을 묻혀 세고 또 세더니 3,000원을 내 주셨다.
"할머니 많이 파세요. 오래오래 사시구요."

어느 새 형은 평상에서 내려와
천천히 차에 오를 기세다.
커피를 한 잔씩 뽑아 들고 달려가 차에 올랐다.
식사 후엔 으레 우린 소설 여행을 떠난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소재를 찾아 보는 여행이다.
몸이 불편하여 평소엔 옴짝달짝 못하지만,
후배의 차를 타게 된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형은 미안한 마음을 여러 차례 표현했지만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오히려 섭섭하다.
아직은 이름 없는 소설가이지만,.
머지 않아 필명 '정자현'의 이름이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될 날이 옴을 나는 믿기에
한 때나마 그 분의 다리가 되어 그를 도왔다는
영광스런 이력을 쌓고 있으니까.^^

오늘은 통일전 옆, 서출지를 찾았다.
푸른 연잎이 가득한 연못 둑 위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면서 처음 와 본 감격을 표현했다.
"말로만 듣던 곳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경주 촌놈이 따로 없어.
몸이 성할 때도 난 책만 봤지.
돌아다닐 줄도 몰랐어.
여행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다니까."

아사달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그 유명한 '영지'라는 연못을 찾았다.
거기서 형은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다만 현진건의 '무영탑'이라는 역사소설은 어설프다는 것,
역시 그의 작품은 단편이 압권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특히 '운수 좋은 날'이 보여주는 구성의 치밀함에
감탄을 했고,'타락자'란 작품은 맘에 안 든다고 했다.

병윤형과 함께 다니다 보면 참 재밌다.
소설가다운 면모가 고스란히 배어난다.
그저 듣고만 있어도 맘이 편해진다.
지금은 문화관광부 장관이 된 친구 이창동씨와
영양고등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시절,
의견 충돌 끝에 이창동씨의 얼굴에
막걸리를 쏟아버린 일화를 오늘 이야기했는데,
듣고 보면 그 고상함과 호탕함이
하늘을 찌를 듯 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여전히 그 기인의 면모는 남아 있다.
고통과 좌절 속에 무위도식하던 지난 날,
나름의 속앓이를 많이 하면서 힘들었지만
말투에 남아있는 선배의 氣는 날카롭기 그지없다.
좋은 작품을 써서 내게 주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기대하고 싶다.

오늘 마지막 헤어지면서, 이런 말도 했다.
"김윤규 교수를 보거든,
내가 반드시 좋은 작품 써서 보여 주겠다는 말을 꼭 전해라."

도서관으로 뒤뚱거리며 들어가는
병윤 형의 뒷모습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아 보였다.
......................


p.s) 오늘 이야기라 썼지만
벌써 하루가 지난 이야기가 되고 말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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