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최영철
어두침침해진 쉰을 밝히려고 흰머리가 등불을 내걸었다 걸음이 굼뜬 쉰, 할 말이 막혀 쿨럭쿨럭 헛기침을 하는 쉰, 안달이 나서 빨리 가보려는 쉰을 걸고넘어지려고 여기저기 주름이 매복해 있다 너무 빨리 당도한 쉰, 너무 멀리 가버린 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까봐 하나둘 이정표를 심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댈까봐 고랑을 몇 개 더 냈다
그사이 거울이 게을러졌다 빈둥빈둥 거울이 몰라보게 늙었다 침침하게, 쉰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눈을 찡그리고 있다 저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고함을 내지르고 있다 뿌리치고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눈이 자꾸 어두워져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보다 못한 거울이 흰머리를 하나씩 뽑아주고 있다
- 시집 『찔러본다 』(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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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한 드라마의 별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룹 임원회의를 주재한 회장이 머리가 허연 한 간부에게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다. 쉰여덟이라고 하니 ‘육십도 안됐는데 와 그리 머리가 허옇노?’ 염색도 못하냐면서 ‘저 친구 당장 사표 받고 내쫒아라’고 명령한다. 그 임원은 집안내력이라며 다음엔 꼭 염색을 하겠다고 읍소했지만 소용없었다. 늙은 회장 앞에 흰머리 자랑하는 그 정신상태가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쉰 즈음 거울 앞에서 귀밑머리 새치를 발견하는 순간 ‘아, 나도 이제 늙어가는구나’ 실감한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노화현상은 비단 머리카락만이 아닌데 사람들이 유독 흰 머리카락에 신경 쓰는 것은 그것이 주는 시각적인 충격 때문일 것이다. 실제 드라마 등에서 배우들이 늙은 역할을 할 때 귀밑의 흰머리 몇 올이면 확실히 나이든 태가 났다. 하지만 머리가 허옇다고 멀쩡한 사람의 목을 치다니 그런 호랑말코 같은 어이없는 설정이 어디 있나.
이래저래 나이 쉰은 쉰 세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신체적으로 각종 기능이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때다. 남성은 성기능이 저하되고 여성은 폐경을 맞는다. 사회적으로는 40대에 밀리고 그렇다고 노인도 아닌 어정쩡한 낀 세대다. 50대에는 아내 잃어버리는 것 다음으로 충격이 크다는 실직의 수렁이 도사리고 있다. 생의 하강곡선을 그리면서도 아직 부담이 무겁게 몰려있는 시기이고 노후를 위해 쥐뿔도 준비해 놓은 것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빨리 당도한 쉰, 너무 멀리 가버린 쉰’이었다. 게을러지고 몰라보게 늙은 거울에다 공연히 심통을 부려본다. 어느 곳에서 자신을 표현해야할지 방법을 모르겠고 어떻게 드러내야할지도 모르겠다. 나를 대표할만한 뚜렷한 가치체계란 없다. 정체성이 흔들리고 총체적인 위기감이 밀려온다. 늙어 가는 것이 서러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게 더 서럽다. 그렇다고 비명을 지르거나 엄살을 부릴 수도 없다.
이미 반백을 넘어 순백이 되어가는 머리를 염색하지 않은지 몇 달 된다. 쉰 중턱을 넘어서니 비로소 고뇌까지 껴안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럴 때 '그 흰 머리 참 근사해' 립서비스라도 그리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내 깜냥만큼 꿈을 꿀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다가올 어느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매 순간을. 오늘은 내 남은 생에서 가장 젊고 빛나는 날이므로.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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