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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날에 우리는

알립니다

by 우람별(논강) 2010. 11. 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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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학생의 날,

스승의 날이나 어버이 날처럼 기념식이라도 하면서

학생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분명히 했던 사건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오늘날 우리 학생들의 참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무슨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했는데.....

 

다음은 반별로 게시교육용으로 배부된 자료를 블로그에 옮겨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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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학생의 날은 광주항일학생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학생들에게 자율적인 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해 제정된 정부 주관의 기념일이었다.

 

  3.1운동, 일제는 3.1만세운동 이후 허울 좋은 문화정책이라는 새로운 식민정책을 시작했다. 이 문화정책은 겉으로는 아주 부드럽고 온순하게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강압통치보다 더 우리 민족의 독립, 해방의 의지를 좀먹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불어도 꽃은 피듯이 우리 민족의 저항 의지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1927년 민족 저항의 의지가 신간회를 탄생시켰고 상당 기간 민족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1926년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학생운동단체 성진회가 만들어지고 광주여고보, 목포상업학교 등 각 학교의 독서회를 포괄하는 항일 투쟁 단체로 발전시켜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일찍이 이곳에서는 식민지 교육 철폐와 민족 교육 실시라는 민족 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된 사건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광주를 출발한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시작되었다.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우조 등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을 희롱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후쿠다를 응징하면서 패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이 싸움은 이른바 내지인인 일본인과 식민 통치 아래 비인간적이고 반민족적인 교육에 시달린 조선인 학생 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여기에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들의 편을 들고 조선 학생들을 구타했으며 일본 언론도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을 옹호하는 보도를 냈다.

 

  11월 3일, 일본 4대 명절의 하나인 ‘명치절’(메이지 천왕 생일)인 당일 기념식에 참가했던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광주고보의 조선인 학생들 간의 대규모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조선인 학생들의 기세에 눌린 일본 학생들이 광주역 쪽으로 도망을 치게 되자 이에 기세를 올린 광주고보 학생들은 당시 싸움을 편파적으로 보도한 일본어 신문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여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후 광주역에서 300여명의 조선 학생들이 모여 ‘조선 독립 만세’, ‘일본 제국주의 타도’,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의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시민들과 합세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이러한 민족적 투쟁에 일본 경찰은 물리력을 동원한 위협과 탄압으로 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한국 학생 75명을 구속하고 일본 학생은 7명만을 구속했다가 모두 석방하는 우를 범했다. 이에 신간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날의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한 지원 활동을 벌이게 된다.

 

  드디어 11월 12일. 이 날은 마침 광주 장날이었다. 전날 밤새워 만든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라는 격문을 가슴에 품고 등교한 학생들은 오전 9시 30분 그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광주고보, 광주농교, 광주사범의 학생 시위대는 광주형무소를 포위하고 ‘구속자 석방’과 ‘조선 독립’을 외치면서 격렬하게 시위했다. 이 날 시위에서 광주고보생 300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100여명이 경찰에 구속당했다. 일제는 약 70여명에게 체형을 선고했다. 광주, 전남 지역에서 일어난 이 민족 운동은 마침내 전국으로 그 불씨를 퍼뜨렸다. 12월 2일 경성제대를 비롯한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알리고 전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그리고 수많은 학생들이 가두 시위와 동맹 휴학 등으로 민족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서울에서 주로 참가했던 학교들은 경성제1고보, 경성제2고보, 경신학교, 보성고보, 휘문고보, 배재고보, 이화여고, 배화여고 정신학교 등이었으며, 개성, 부산, 청주, 대전, 정읍, 이리, 평양, 신의주, 함흥, 원산 등 전국 곳곳에서 불길처럼 민족 독립의 깃발을 내건 투쟁이 이어지게 된다. 이는 3.1운동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었다. 1930년 3월까지 전국의 참가 학교가 194개교, 참가 학생 5만 4천명, 투옥 580여명,

 

무기정학 2,330여명이라면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이 광주학생운동은 12월 13일 광주학생운동의 진상 보고를 겸한 민중 대회를 열려던 신간회를 경찰이 습격하여 간부 44명을 검거하는 것으로 한풀 꺾이게 되지만, 민족의 비극적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떨쳐 일어난 애국 학생들의 투쟁은 그 후에도 민족 독립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이어져 항일 운동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학생의 날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해, 항일 학생운동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의미에서 1953년 10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정부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유신체제가 시작되자 반정부운동이 확산되면서 학생 운동도 거세지자 1973년 3월 30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6615호)을 공포해 학생의 날을 폐지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다시 학생의 날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져, 정부의 공식 기념일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1985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학생의 날은 문화교육부(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가 주관하는 정부 행사로 다시 인정되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기념행사를 전국적으로 확대해 실시할 수도 있으며, 행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총무처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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