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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옛날에 옛날에

by 우람별(논강) 2009. 11. 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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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원주의자 공민왕,
         그가 원나라 노국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반원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자주국가 고려의 꿈을 실현시켜 가는데…

 밤낮으로 죽은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왕은 항상 여자 모양으로 화장을 하였다 - <고려사>


 

 

 

1. 왕이 이상해졌다!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 마주 대하여 밥 먹으니…
                                                                   <고려사절요>

 "공주의 영정과 마주 앉아 연회를 베풀었다…
  항상 자신을 여자 모양으로 화장하였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고려사>

 <고려사> - '심질환' 

               

1367년 1월.

공민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부인의 영정을 앞에 두고서.

 

아내가 죽은 지 이미 삼년째였지만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왕은 공주의 초상과 마주 앉아서 음식 드는 절차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 <고려사> (공민왕 16년)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했던 개혁군주였지만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질환,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왕의 마지막은 시리고... 또 아팠다...

 

공민왕.

고려의 개혁군주로 평가받는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고려는 이미 기우러져 가고 있었지만

그가 왕이 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공민왕 뒤로 우왕, 창왕, 공양왕이 즉위했지만

고려는 사실상 공민왕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런 공민왕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공민왕의 정치적 업적과 달리 개인적으로 '정신병'이란 단어로 못박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에 아주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39권의 방대한 기록

<고려사(高麗史)>가 보관되어 있다.

 

고려왕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열녀와 간신 등 약 천여 명의 열전까지 실은 역사서다. 

 

그중 공민왕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왕의 본래 모습은 왕다웠다.

 

"왕위에 23년 있었으며 나이는 45세였다."

 

"왕의 성격이 본래 엄격하고 신중하였으며 행동이 예의에 맞았다."

                                                

"그러나 만년에 와서 의심이 많고 조포하며 질투가 강하였다."

                                                             - <고려사> (공민왕 23년 9월)

 

같은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는 급격한 변모.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로는 과도하게 슬퍼하여 의지를 상실했다."

                                                              -<고려사> (공민왕 23년 10월)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하지 못하였다.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서 밤낮으로 마주 대하여

밥 먹으면서 슬피 울고 3년 동안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민왕 24년 4월)

 

그녀는 몽골 사람이었다.

공민왕은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몽골음악을 듣고 또 연주했다.

 

"공주의 영정과 마주 앉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몽골음악을 연주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시간이 흘려도 그리운 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공주의 영정이 빗물에 상하지 않을까 늘 살픽 걱정했으며

공주의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공주의 재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은 생시처럼 공주를 극진히 챙겼다.

 

공주를 보낸 지 8년이 지나도

공민왕은 여전히 공주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민왕 22년.

공주가 유난히 그리웠던 10월.

공민왕은 제사를 지낸 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능 밑에서 밤을 보낸다.

 

"왕이 친히 정릉(노국공주 무덤)에 제사지낸 다음

술좌석과 음악을 베풀어 놓고 그날 밤 능 밑에서 잤다."

                                                                    - <고려사) (공민왕 22년 10월)

 

 "공민왕에게 있어서는 노국공주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는 듯 합니다.

성스럽고, 정신적 지주이고,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신용구(정신과 전문의)

 

충남 예산군 <수덕사>.

이곳에 공민왕의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했음을 보여주는

그의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민왕 금(琴)'이 있다.

 

'공민왕 금'은 수덕사의 승려 만공

고종의 둘째 아들 이강(의친왕)으로부터 1899년 물러받은 거문고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밤마다 슬픔을 달래 뜯었다고 하는 거문고엔

'공민왕 금'이란 금명이 선명하다.

 

거문고 바닥엔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이조묵의 시도 새겨져 있다.

 

'공민왕이 신령스러운 오동나무를 얻어 이 거문고를 만들었으니...'

 

음악을 사랑한 감성적인 공민왕.

그의 성격이 섬세한 만큼 슬픔은 깊었다.

공민왕은 공주를 잃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1372년 10월 1일의 <고려사> 기록이다.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그것은 여장이었다.

 

"항상 자신을 여자 모양으로 화장하였다."- (공민왕 21년 10월) 

 

분명 기이한 모습이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정신병을 얻은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을 얻었다." - (공민왕 21년 10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속에 스며들어 있다.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길래,

그야말로 국경을 넘어 영혼이 통하는 사랑이었던 듯 하다.

 

 

2. 반원주의자 공민왕, 원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지다

 

그렇다면 고려 왕자였던 공민왕과

멀고 먼 원나라의 노국공주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고려가 처했던 비극적 현실속에 그 답이 있다.

 

중국의 베이징.

베이징은 공민왕이 살았던 시절에도 '대도(大都)라 불리는 수도.

원나라 황제가 살았던 황도인 만큼 토성 등의 유적지가 곳곳이 남아있다.

 

'원 대도성 토성 유적지(元 大都城 墻遺址)' 

 

가로 24미터, 높이 12미터였던 토성은

600여 년의 세월에 늙어버려 이제는 작은 언덕으로 변해버렸다.

토성 내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켠에

쿠빌라이 칸(원 세조, 1215~1294)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베이징에 입성할 당시 모습이다.

 

원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전무후무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의 예술은 화려하게 발달했다.

 

이때 수많은 이민족이 유입되었고

원나라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관청을 설치했다.

 

"원나라 대도에는 외국인들을 접대하는 전문관청이 있었습니다.

그 관청은 대도성을 설계할 당시에는 외성 쪽에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교류가 늘어나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자

황성의 앞부분과 지금의 왕푸징에서 자금성에 이르는 북동쪽에

외국인 관련 시설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 진따수 교수(베이징대 고고연구소)

 

현재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건국되며 새로 지은 것이다.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기 이전에

이곳에 공민왕이 있었다.

 

1441년.

열두살에 볼모로 끌여온 어린 공민왕.

공민왕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몽골족은 원나라를 세운 뒤

투항한 정권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질들은 주로 원나라 황제의 호위군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많은 왕들 역시 젊은 시절,

원나라의 대도(수도)에서 황제의 호위군을 맡았습니다."

                                                                        - 짱판 교수(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그러나 공민왕은 고작 12살.

이곳에서의 공민왕은 단지 어머니와 생이별한 어린아이 일뿐이었다.

 

외롭고 두려운 볼모생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는 왕자를 볼모로 잡아두는데 그치지 않았다.

 

원나라는 고려의 왕들을 맘대로 임명했고 또 폐위시켰다.

 

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왕위를 두 번씩 주고받는 기행까지 겪었다.

 

父 - 충숙왕 : 1313~1330, 1332~1339,

兄 -충혜왕 : 1330~1332, 1339~1344.

 

고려의 왕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고려왕의 귀향살이도 흔했다.

 

형 충혜왕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귀향길에 겪은 수모는 특히 모욕적이었다.

원 사신은 고려왕 충혜를 꾸짖고 때리기까지 했다.

 

"왕을 발로 차면서 포박하였다."

"원나라 사신은 고려왕을 꾸짖었다." - <고려사> (충혜왕 후4년, 1343)

 

충혜왕은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으로 귀향갔다.

수행하는 이가 없이 손수 옷보따리를 들고 떠났는데, 그 길로 단명하고 말았다.

충혜왕 나이 29살이었다.

 

"게양은 연경(베이징)에서 2만리나 떨어진 곳이다."

"한 사람도 수행하는 이가 없어 손수 옷보따리를 들고 떠났다."

                                                     - <고려사> (충혜왕 후4년, 1343. 12월)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었고 공민왕 개인적 원한이었다.

 

"원의 집권기는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몽고족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몽고족이 정복한 국가는 거의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 역시 국가의 독립은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원 집권기 중국과 동아시아 관계는 매우 특수하였습니다."

                                                         - 짱판 교수(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고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원은 고려의 왕과 원나라의 공주를 혼인시켰고

그 아들을 북경에 데려가 인질로 삼았다.

 

결국 몽골공주와 결혼한 자가 고려의 왕이 되었고

몽골공주의 아들 된 자가 고려의 왕이 되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

자연히 모계 혈통인 원나라인 왕자에게 왕권은 돌아가게 된다.

 

5명의 고려왕은

모두 7명의 몽골공주와 결혼했다.

이들은 7명의 부인앞에서 고려의 왕이 아닌 신하로 살았다.

심지어 쿠빌라이 칸의 딸에게 장가든 충렬왕은 부인에게 맞고 살았을 정도였다.

 

"충렬왕이 자기(제국대장공주)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욕을 하고 때리기도 했다." - <고려사>

 

공민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 노국공주와 결혼한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1344년 형 충혜왕이 유배길에 오르며

공민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조카 충목왕이 오르고

그후에도 충목왕의 서자 '저'가 공민왕을 제치고 충정왕이 되었다.

 

"공민왕은 두 차례에 걸쳐 왕위계승에 실패합니다.

실패하는 과정에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그 이유가 원 황실과의 부모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란 것,

바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국공주와 결혼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홍영의(국민대 연구교수)

 

게다가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이었다.

공민왕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공민왕은 두 번의 왕위를 빼앗긴 지 불과 5개월 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서둘러 혼례를 치뤘다.

그리고 2년 뒤 공민왕은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원나라 공주 노국공주의 결혼.

그것은 당연히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천생의 인연이 됐고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킨다. 

 

 

3. 역경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에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이 한 점 보관되어 있다.

 

<천산대렵도>.

원래는 두루마리 형태였으나

지금은 형태만 남아 '수렵도'라고도 불리는 <천산대렵도>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그림이

정교한 필치와 깊이있는 색조로 묘사되어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 화가다.

그 수준은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공민왕의 그림은 세밀함이 현실 같으니 진실로 세상 사람의 그림 같지 않았다." - <양엽기>

 

"필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 조선 숙종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공민왕.

 

그는 고려의 다른 왕들과는 기질이 달랐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대신 고려의 호방한 기질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공민왕은 고려라는 나라에서 사냥을 하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고,

심지어 말도 타지 않았다.

 

"왕은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려사>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감성적인 코드가 일치했다.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1349년 <고려사> 기록에 나타나 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후궁을 들이자는 청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결혼 11년째였다.

결혼하고 십 년이 지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대신들의 청은 어렵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재상들이 공주가 아들이 없으니 명문집 딸로서 아들을 낳을 만한 여자를 선택할 것을 청했다."

                                                                                            - <고려사> (공민왕 8년 4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시련을 이기며 돈독해졌다.

 

20만 명의 홍건적이 무서운 속도로 남진해

20여 일 만에 평양이 함락되고

두 달 후 개경까지 넘어갔을 때 

공민왕고 노국공주는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은 험했다.

 

"신미일. 비와 눈이 내렸다.

왕이 이천에 머물렀는데 옷이 젖고 몸이 얼어서 섶으로 불을 피워서 몸을 녹였다."

                                                                      - <고려사> (공민왕 10년 11월)                           

 

한 달 뒤 12월.

마침내 공민왕 일행은 안동에 도착했다.

 

<영호루(映湖樓)>는 안동의 대표적 정자다.

고려말 유학자 포은 정몽주(鄭夢周)

유학의 대학자인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편액이 걸려있다.

 

안동에 머물던 공민왕도 <영호루>에 편액을 내렸다.

영호루의 현판은 안동 피난시절 공민왕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왕이 서연에 참가하셔서 '영호루' 세 글자를 써서 내렸다(映湖樓 三字)"

                                                          - <고려사> (공민왕 10년 12월)

 

공민왕은 영호루를 자주 찾으며 심신을 추스렸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었던

안동김씨와 권씨, 장씨의 위패를 함께 모신 <태사묘>.

 

이곳엔 공민왕이 안동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내린 유물들이 남아있다.

 

색실로 복숭아꽃, 나리꽃, 무궁화, 모란 등의 꽃무늬를 수놓은 비난,

모란꽃으로 장식한 금대인 허리띠,

금대를 포함한 두 대의 혁과대

관직에 많이 등용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한 공민왕이 직접 사용했던 은식기도 남아있다.

은식기와 은수저는 안동 백성들의 식복을 축원하고 있다.

노국공주가 사용했던 부채도 있다.

부채살이 없는 특이한 모양의 부채다.

 

안동의 옛이름을 딴 읍지인 <영가지(永嘉誌)>.

여기엔 공민왕이 안동을 도읍지로 승격시킨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공이 피난하여 안동에 머물 때 고을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공손하였으며

개성을 다시 되찾는데도 안동 주민들의 도움에 크게 의지하여

왕은 안동을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 <영가지>

 

"공민왕이 안동을 떠날 때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 이렇게 이야기 했고,

복주목을 대도호부로 승격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동 대도호부에 대해서 세금을 면제해주고,

이런 것은 모두가 안동 주민들이 합심해서

공민왕이 잘 머물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 배영동 교수(안동대 박물관장)

 

 

 

                         놋다리 밟기(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그때부터 안동에 전해져 오는 '놋다리밟기'

 

'놋다리밟기'는

실감기, 실풀기, 놋다리의 세 가지 춤으로 구성된다.

 

포로나 다름없는 공민왕이 그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실감기와 실풀기,

그리고 노국공주가 안동 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길을 가는 것이 놋다리다.

 

"왕의 일행을 맞이하러 갔던 농부의 부녀자들이 자진해서 엎드러서 인다리를 놓아서

왕후인 노국공주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는 것에서 유례되었습니다."

                                                           - 김경희 (놋다리밟기 보존회 예능보유자)

 

유례는 이렇다.

안동에 도착한 노국공주가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마을의 부녀자들이 등을 굽히고 무사히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안동 사람들은 노국공주를 극진히 대접을 했고,

공민왕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안동은 해마다 노국공주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며 잔치를 베푼다.

 

 

<공민왕이 안동에 체류한 70여일의 역사를 기념하는 재현 행사>

시련의 시기 사랑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노국공주는 안동에서 공민왕을 설득해 말 타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천생의 베필이었다.

 

"왕과 공주는 밤이면 후원에 나가서 말타기 연습을 하였다." - <고려사>

 

2년 뒤 흥왕사(1363년 윤3월)

괴한 50여 명이 공민왕의 처소에 침입했다.

반역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그녀가 나섰다.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가라."

 

반란군은 원나라 공주의 기세에 역모를 포기했다.

 

"공민왕의 개혁 움직임들을 노국공주가 동조하지 않았다면,

적극적으로 아니더라도 호응을 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후의 흥왕사의 반란이라든가 이런 걸 봤을 때

그냥 단순한 부부관계를 넘어서

정치적 목적에 상당히 동조를 해서 움직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형우 박사(서울시 문화재과 팀장)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야기는 

7세기가 지나도록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으로 쓰일 양곡을 저장하던 창고터.

서울 마포 광흥장 터(廣興倉 址).

 

여기에 '공민왕 사당(恭愍王 祠堂)'이 있다.

 

그런데 '공민왕 사당'엔 그 홀로 모셔져 있지 않다.

노국공주도 함께 있다.

 

사당에 부부를 함께 모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4. '자주독립국가'의 꿈!

                          숙청의 칼끝은 원나라를 향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노국공주의 사랑에 힘입어 공민왕은 거침없는 개혁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반원의 기치를 들고 피의 숙청을 진행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한 역사서다.

 

<고려사>에 누락된 내용도 실려있는데

공민왕에 대한 일화도 첨가되어 있다.

 

<고려사절요>는 그날의 기록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1356년 5월 18일.

피비린네가 진동한 날이었다.

그것은 친원세력의 처단이었다.

 

기철(奇轍)과 그의 아들, 조카, 그리고 권겸() 등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기씨 일당은 이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피가 궁문에 낭자하고 칼날이 길에 가득했다" - <고려사절요> 

 

기철 일당의 처단,

그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기철은 원나라 기황후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누이가 황후에,

조카가 황태자,

기철은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기철이 왕에게 시를 올려 치하하였는데 신이라 일컫지 않았다."

 

오만은 도를 넘었다.

친원파는 고려를 원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운, 조익청, 기철 등은

백성들을 안착시키기 위해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어달라

원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 <고려사> (충혜왕 후 4년, 1343년)

 

원에 속한 권문세족(친원파)들은,

아녀자를 범하고,

으로 관직을 사고 팔고,

각지에 농장을 만들어서 수탈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딸까지 기꺼이 조공했다.

 

"복안부원군 권겸이 원나라 황태자에게 딸을 바쳤다." - <고려사절요> (공민왕 원년)

"경양대군 노책이 딸을 원에 바쳤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3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인사권을 장악한다던가, 

탈점을 한다던가, 고리대금업을 한다던가,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수탈을 하기 때문에

바로 그들이 개혁의 특별 대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 홍영의(국민대 교수)

 

공민왕은 계엄령을 선언한 뒤

이것이 공정한 처사였음을 원에 알렸다.

 

"기철 등이 권력을 빙자하여 임금의 통제에서 벗어나

관리의 선발을 제 기분에 따라 결정하였고, 법을 제 편의대로 운용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5년 6월)

 

베이징 시 후통거리.

 

원의 골목 구조가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원래 흔적은 많지 않다.

보수중인 <원 만송 노인탑>은 많지 않은 원대 탑이다.

 

14세기 원.명 교체기.

 

공민왕이 친원세력을 제거할 당시

원은 각종 농민반란에 시달리는 말기였다.

 

고려에 정벌군을 보내기엔 역부족인 상황,

공민왕은 이 정세를 노렸다.

 

""당시 공민왕이 친원세력들을 척결할 수 있었던 배경은

원나라 정권이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농민반란(홍건적의 난)까지 일어나

원나라가 고려에게 보복할 만한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황후의 가족을 살해했습니다."

                                                                             - 짱판 교수(베이징대 역사학과)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국가 고려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민왕의 꿈은

즉위와 함께 실현되기 시작했다.

 

10년만에 귀국한 공민왕은

먼저 100여 년간에 이어졌던 풍습부터 바로잡았다.

 

스스로 먼저 변발을 풀고 몽골복을 벗었다.

 

"왕은 땋은 머리를 풀고 몽골복을 벗었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원년)

 

풍습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는 전통혼례에도 몽골풍습이 남아있다.

신부의 족도리연지, 곤지가 그렇다.

풍속이 섞이면 정착하기 마련이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금지했다

(停志正年號-정지정년호)

 

그리고 고려에 설치된 원의 관아

정동행성 이문소(罷征東行中書省理問소)폐지했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공민왕에겐 더 큰 포부가 있었다.

 


  

<공민왕의 북방영토 수복-쌍성총관부>

 

쌍성총관부를 격파하고

잃어버린 국방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고려의 땅을 수복하는데 불과 두 달이 걸렸을 뿐이었다.

 

"본래 우리나라 영토였는데

고종 무오년에 원에 함몰된 뒤, 무려 99년 만에 수복한 것이다."

                                        - <고려사절요> (공민왕 5년 7월) 

 

북벌에 대한 공민왕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까지 수복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각오는 마침내 요동을 점령하게 되었다.

 

"進襲遼域(진습요역) -요성을 습격하였다." - <고려사절요>

 

"요동이라고 하는 지역은 예전부터 고려의 영토라 인식되어왔고

원명교체기에 국제질서의 틈바구니를 공민왕은 적절하게 이용했고

그리하여 요동을 정벌한 것입니다."

                                                                            - 홍영의 교수    

 

공민왕의 목표는 한가지였다.

'자주독립국가 고려'

 

노국공주에겐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공민왕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자 조력자였다.

 

공민왕의 거침없는 개혁에 대해서 기득권층의 반발은 극심했다.

 

"전답을 몰수하고 조세를 징수하자 오히려 이 제도의 폐지요구했다."

 (收其田仍追累年之租 '請罷' -수기전잉추루년지조 '청파' )

 

공민왕은 권문세족에 이렇게 응수했다.

"좀도둑이 밤에 다니다가 달 밝음을 미워하는 격이구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재위 내내 지속되었다.

무려 네 번에 걸쳐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백성들이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노비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5. 개혁과 사랑을 함께 한 노국공주의 죽음.

    - 공민왕의 절망, 기행...

 

노국공주와의 사랑과 거침없는 고려의 개혁.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공민왕의 말로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365년 2월.

16년만에 첫 임신. 공주가 위중했다.

 

"공주의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일급 죄인까지 사면하였다." - <고려사>

 

산달이 되며 병이 위급해지자

공은 죄인까지 사면하여 공주의 무탈을 빌었다.

그러나 공주는 죽었다.

 

"왕은 분향하며 단정히 앉아서 잠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공주는 이내 죽었다.

왕은 비통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고려사, (후비열전)>

 

"나라를 가지고 가정을 가지는데 배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렇게 내조의 공을 세운 이에 대해서는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노국공주 덕에 우리나라가 오늘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영원히 국가를 지키고 함께 살아야 할 터인데 그만 세상을 떠났구나!

슬픈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간다."

                                                                        - <고려사, (후비열전)>

 

 


 

                  공민왕 노국공주 쌍릉 (개성시 개풍군)

 

 

개성시 개풍군에 노국공주정릉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 공민왕현릉도 있다.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유일한 쌍릉이다.

 

노국공주의 무덤을 만들 때 공민왕은 쌍릉을 계획했다.

공민왕은 능을 지으며 또한 한 켠에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시켰다.

공주의 초상화를 걸어둘 전각을 짓기 위해서였다.

 

<광통보제선사 터>

3천명의 승려가 지낼 수 있는 절이었다고 한다.

 

"모든 관원들이 등급에 따라서 역부를 내어 나무와 돌을 운반하였다.

나무 한 개를 수백 명이 끌어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있어서

'어기어차'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소가 길에 연이어 넘어져 있었다."

                                                                               - <고려사>

 

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느날.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소?"

 

"공주만한 여자가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왕도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인데 어찌 그다지 심히 슬퍼하시오.

남들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다시는 그리 슬퍼마시오."

                                                                                  - <고려사절요, 1373년 3월>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시켜 정사를 돌봤다.

신돈을 통해 개혁정치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그는 곧 타락했다.

공민왕이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할수록 신돈의 권력은 막강해져 갔다.

 

백관들은 궁궐로 가지 않고 그의 집으로 출근했고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주살했다.

 

공민왕이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신돈의 사망 직후,

그는 자제위를 설치,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경호 집단을 곁에 두었다.

공민왕은 자제위를 늘 곁에 두고 새로 맞은 왕비조차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이 무렵부터 <고려사>는 공민왕을 정신 이상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은 극도로 문란해져 갔다.

자제위 소년들의 밤을 훔쳐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기이한 왕의 행적이었다.

아내들을 멀리 하고, 여장을 하고, 또한 지나치게 총애하는 자제위까지...

<고려사>의 기록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김흥경과 홍륜 등을 불러들여서 난잡한 행동을 하게 하고

왕은 곁방에서 문틈으로 엿보았다."

                                                                  - <고려사, 공민왕 21년>

 

그렇게 2년.

1347년 9월.

공민왕은 자제위 홍륜에 의해 살해되었다.

 

고려의 개혁군주로 23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고 그리움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9년.

마흔 다섯의 왕의 죽음은 허무했다.

 

공민왕은 생전의 바램대로 노국공주 곁에 잠들었다.

 

고려의 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평가받는 공민왕 무덤의 내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하도록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은 특별한 구조로 되어있다.

 

작은 구멍이 그것.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두 왕릉 사이, 영혼을 연결하는 길인 것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곧잘 회절되었다.

 

조선의 정수를 관통하는 <종묘>.

조선의 왕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공민왕이 있다.

그리고 공민왕 곁에 노국공주도 있다.

공민왕을 모시기 위해 노국공주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일반 다른 왕과 왕비와는 달랐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신하들 뿐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공민왕 가는데는 노국공주도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민간 신앙으로까지 만들어지고,

심지어 조선의 종묘에 고려 '공민왕 사당'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말입니다."

                                                                           - 이형우 박사(서울시 문화재과 팀장)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성역에 왜 유일하게 고려 공민왕의 사당을 세웠을까.

 

이성계는 한낱 시골 변방의 호족출신으로

공민왕이 장군으로 발탁 기용하지 않았으면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없었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쌍성총관부 고토회복 전투로 공을 세워

함경도지역 천호(千戶)에서 만호의 병마사가 되었고,

 

동녕부에서 고려를 넘보는 몽골군을 동북면원수에 임명된 이성계

단번에 섬멸해 대승을 거두고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공민왕 사당을 세운 것은

공민왕과의 의리,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행동 아닐까.

 

또한 침략 몽골에 항거하여 허약한 국력을 되살려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민왕의 업적을 존경하며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역사의 신화가 된 세기의 사랑이었다.

 

공민왕의 마지막 행적이 이처럼 기이한 것은

고려의 마지막 역사가 조선에 의해 씌여진 점도 감안해야 한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고려와 공민왕의 말로는 이처럼 어둡게 씌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국공주와의 사랑만큼은 조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폄하할 순 있어도 그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6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시간을 초월한 사랑으로 기억된다.

 

 

- 한국사 전(전)을 보고

  (날씨가 춥습니다. 평안하소서!~~)

 

* 종묘 부분 - 소설가 박종윤, '종묘의 공민왕' 인용.

출처 : 바람재 들꽃
글쓴이 : 황금마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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