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권정생 선생께서 살던 곳을 가고 싶었다. 두통으로 며칠간 고생을 하던 아내에게
바람을 씌워주면 증세가 조금은 호전될 것이고, 김명희 선생님께서 최근 책을 저술하셔서
영광스럽게도 내게도 그 책('낯선 익숙함을 찾아서', 나라말 출판)을 한 권 보내주셨는데
그 첫머리에 '7평짜리 오두막집에 사는 성자'란 부제를 달고 기술해 주신 글을 다 읽고
다시 당장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내도 고향가는 기분으로 선뜻 따라 나선다.
보물 57호, 안동 조탑동 5층전탑의 모습, 권정생 선생 살던 곳과는 지척에 있는 유명 문화재다.
감실 양 옆의 금강역사상, 속세인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험상궂으면 좋을 텐데
'어서 오시라요, 반갑습니다' 하고 귀엽고 익살스럽게 웃기만 하고 있는 것 같으니......
한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이 40년간 살던 집은 대문이 없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화장실도 재래식 그 자체다. 벽돌 몇 장 쌓아서 비바람만 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방으로 들어가는 섬돌은 자연석그대로다. 문이 구멍난 것은 누군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일부러 뚫은 것 같은데, 덕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예외없이 거기에 눈을 가까이 대는가 보다.
문짝 위에는 선생이 직접 써놓은 문패가 복사되어 다시 못에 박혀 있다.
원본은 누군가 보관하고 있을까? 혹시 김용락 시인?
문살 틈으로 카메라 렌즈를 집어넣고 방의 내부를 담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아서 세상에 좀 알릴까 싶어요.'
40년 된 흙집 마당엔 질경이풀로 뒤덮여 있었고 차양 밑부분만 흙마당임을 드러내고 있다.
봉당 아래 평상이 하나 새로 짜여 있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잠시 앉아 쉬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네!! 나도 거기에 앉아 살아계실 때 모습을 상상하면서 한참을 쉬었다.
집 뒤의 약간 높은 곳에는 바위층이 있고 그 위로 물이 흐르면서 좁은 홈이 파여 내려가고 있다.
방명록이 놓여 있어서 간단히 하나 적었다. 살아 생전에 얼굴 한번 뵙고 싶었는데......
건강이 안 좋아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더욱 찾기가 어려웠다.
선생께서 사시던 집을 찾아 그분의 삶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으니 만족해야 한다.
대구의 김용락 시인께서는 임종까지 지켜보셨다는데, 김 시인만큼은 끔찍히 사랑했던가 보다.
<강아지똥>이란 작품이 연상되는 민들레꽃 하나가 흙벽 아래 외로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흙벽이 비에 맞아 허물어짐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양철 지붕의 일부를 덧대어 세워 놓았다.
제법 큰 앵두나무가 집 옆에 서있는데, 누군가 다 따 먹고, 일부만 남았다.
나도 두세 개 따서 아내에게 갖다 주니, 그냥 먹어도 되냐고 한다.
권 선생님한테 감사해 하면서 먹으라 했다. 아, 보고 싶은 권선생님!
고인돌 같은 큰 바위가 이 집의 명물이다. 선생은 이 위에 간혹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장실의 잠금장치에 선생의 손때가 묻어있을 듯해서 나도 한번 잡고 돌려보았다. 내부는?
슬레트 지붕의 간이 건물은 상여를 보관해 놓는 곳집이 아닐까 한다.
1980년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데,선생은 이곳을 자주 지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막바지 죽음을 의식하면서 2005년 5월 1일자로 유서를 남겼다. 인용해 보겠다.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을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일직교회
일직교회 종지기로 그 문간방에서 살기 시작한 1967년,
그 때의 시절을 회고한 내용을 보면 어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싶다.
성자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권정생 선생이었음을 보여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 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 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중에서)
폐교된 일직남부초등학교, 이곳은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옮겨갈 예정지이자
권정생 문학관이 세워질 곳이라고도 한다. 선생이 1946년에 일본에서 돌아와
외가인 청송 현서면 댓골에서 2년 남짓 살다 아버지의 고향인 안동으로 옮겨온 뒤부터
다닌 모교이기도 하단다.(김명희 선생님의 '낯선 익숙함을 찾아서' 인용)
이곳은 또 국어과 선배님이신 장광수 형의 모교이기도 하니 형은 권정생 선생의 직속 후배인 거다.
여기까지 온 김에 대구 사는 광수형한테 전화를 걸어서 형네 고향에 왔다고 안부를 전하니, 가라사대
"교문 왼쪽에 있는 느티나무가 보일 것이다. 그거 내가 50년 전에 심은 나무야!!!!"/"그래요?"
이 그늘 좋은 느티나무가 광수 형께서 초등학교 다닐 때 심은 것이라고 하니 놀랍다.
넓게 드리운 그늘이 꼭 광수의 형의 넉넉한 마음 같아서 잠시 그 안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들리지 않고 수확해 놓은 양파들만 을씨년스럽게 쌓여 있다.
작은 규모의 학교라도 있어서 그나마 좋았는데, 최근 농산어촌 학교의 통폐합 운운하며
경제 논리로 학교를 점점 줄여만 가고 있어서 정말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사라진 폐교의 을씨년스러움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을까?
폐교 바로 옆, 비내미마을에 있는 '소호헌(蘇湖軒)'은 팔작지붕의 아름다운 건물로서 보물 475호다.
명종 때 함재(涵齋) 서해 선생이 書室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하는데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다.
소호헌의 초석과 기둥, 옛모습 그대로인 같아서 눈에 확 들어온다. 인상깊다.
함재 선생의 아들인 약봉 서성 선생이 태어난 곳, 약봉태실이다.
소호헌 누마루 위쪽에 붙은 현판이다. 누가 썼는지 시원스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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