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1997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가 세운 모란공원 민주열사 추모비 내용의 일부이다. 추모비 앞에 경건하게 머리숙여 서서 방문자 신고를 마치고, 천천히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돌아보기로 한다.
고인들의 이름과 삶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가냘프게 서 있다. 끝까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서 열사들이 생을 마감한 세월만큼이나 빛이 바랬다. 삶을 일일이 더듬어 찾아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분들이다. 통일애국지사(도강호, 김남식, 곽태영), 노동열사(이종대, 김태환), 노동운동가(박상윤, 김종배, 안동근, 박동진, 이정미), 민주열사(박종철, 김기설), 농민열사(전용철), 자주통일열사(정유미), 노동해방열사(조정식), 농민운동가(엄성준), 애국학생(전철원), 민족민주노동열사(허세욱, 이춘자), 장애해방운동가(정태수) 등 조금씩 표현이 다르지만 특별히 이곳 민주열사 묘역에 묻혀서 찾아온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울리는 분들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시간을 두고 오래 머문 곳을 위주로 정리해 본다.
故 이춘자, 1960년생,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 2007년 월간 ‘노동세상’을 창간, 발행인을 겸해서 열심히 일하며 살았던 분이었는데, 작년 이곳에 묻혔다. ‘노동세상’ 독자였기에 자연스레 접한 그녀의 부음,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과연 어느 정도 담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여전히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독자 곁을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가 차라리 부럽다. 검은 묘비의 왼쪽에는 살며시 미소 짓는 사진, 그 오른쪽에는 음각의 하얀 글씨가 선명하다. ‘그늘진 곳에서 피어난 봄꽃’ 노동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삶의 세인들의 평가를 그렇게 적은 것이리라. 고이 잠드소서.
민주주의자 김근태, 그는 작년 말, 독재시절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지병인 파킨슨씨병을 견뎌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던 투사로서의 면모와 따스한 인간적 면모를 두루 갖췄던 정치인, 그는 현 정부의 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목격하면서 가슴을 쳤고, 선거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되찾아야만 하고 당신이 앞장서겠다고 강한 집념을 보이더니 결국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세상을 등졌다. 묘비 뒷면에는 1987년 케네디 인권상 수상(인재근과 함께), 1988 함부르크 자유재단 ‘세계의 양심수’ 선정, 15,16,17대 국회의원, 2004년-2006년 참여정부 보건복지부장관 등의 약력과 ‘나는 정직과 진실이 이르는 길을 국민과 함게 가고 싶다’는 어록이 새겨져 있어서 고인의 삶이 어떠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 갖다 놓은 꽃다발에는 ‘의장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모님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습니다. 당신의 기도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세로로 길게 쓰여 있다. 고인의 무덤 옆 빈 공간에는 유난히 보랏빛 제비꽃이 많이 피어 있고, 노란 고들빼기꽃도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하늘하늘 움직였다. 묘 옆의 주목과 소나무 한 그루는 든든한 지킴이의 역할을 자처하려는 듯 늠름하다. 20여 년 전쯤, 서울대학교 **광장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이 모여 전국교사대회를 진행하고 있을 때 수배 중인 몸에도 불구하고 귀신처럼 나타나 특유의 연설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지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민중의 아들, 87년 6월 항쟁을 부른 주역, 민주화의 선봉에 선 학생운동가 그 거룩한 넋을 만대에 기리기 위해 초혼을 하여 여기 비를 세운다.’ 백우도승의 글, 신영복 글씨로 새겨져 있는데,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신영복 선생의 독특한 글씨체와 너무 다른 해서체라서 오히려 독특하다. 남산 중턱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죽어갔던 박종철, 그의 죽음이 고문에 의한 것이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시의 분노한 지식인들과 민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독재 타도와 민주쟁취를 외치며 목숨걸고 투쟁하기 시작했으니 그게 곧 87년 6월 항쟁이었고, 그 시작이 곧 박종철의 죽음이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결국 철옹성 같던 군부정권이 결국 국민들에게 항복, 대통령직선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태우의 6.29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민중의 위대한 승리를 경험했던 소중한 역사 체험이었다.
늦봄 문익환, 봄길 박용길 장로님의 묘(합장) ‘통일의 선구자, 겨레의 벗’이라 새겨진 묘비 옆에 섰다. 그의 삶은 오로지 통일을 향한 몸부림으로 점철되지 않았던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전라도 강진 땅에 그의 정신을 기려 세운 학교가 있어 들른 적이 있었지. 당신 생각나? '늦봄학교' 윤동주 시인의 절친이었던 그였어. 해방 이후의 남북분단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민족문제로 판단, 오로지 통일과 민주화 운동에 몸바친 고인의 정신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큰 감동이 아닐까?
아들 전태일이 죽어가면서 한 유언을 지키기 위해 남은 여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사셨던 이소선 여사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은 일기에 썼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리고 세 달 뒤 그는 분신을 했다. 1970년 11월 13일 밤10시, 전태일은 죽었으나 더 많은 전태일이 우리 곁에 살고 있다. 가난한 노동을 제 몸에 끼얹고 여전히 불타고 있다. 그가 떠나고 40년이 훨씬 지났지만 160여 명의 ‘전태일’이 세상을 떠났다. 아, 슬픈 대한민국!!!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시나리오 이창동)이란 영화로 세상에 더 알려진 전태일, 그의 무덤 왼쪽 옆에는 삼백만 근로자대표 기독청년 전태일의 묘라고 쓰여진 비가, 오른쪽 옆에는 전태일 동지추모비가 새겨져 있고, 무덤 왼쪽 뒤쪽으로는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있는 전태일 열사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누군가 갖다 놓은 꽃다발 하나, 그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은 삶이었고, 현재까지도 그 올곧은 희생정신은 흠모의 대상이다.
불붙은 철구조물에서 새까맣게 타 죽어야 했던 다섯 분의 마지막 비명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끝까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가 시위 진압경찰의 지나친 진압작전에 의해 결국을 동시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다섯 분의 고인을 위해 묵념을 올리고 있으니
지켜보던 한 여인네가 슬며시 말을 건네는데 침울하다.
“혹시 무슨 고인들과 연고가 있기라도?”
“아닙니다. 지나가는 길에 그분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명복을 빌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경상도 구미에서 왔습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까?”
“아무것도 변화된 게 없어요. 맨처음 그대로랍니다.”
거의 체념한 듯한 말투의 대답이다. 흰 장갑을 끼고 묘에 돋아난 크고 작은 잡풀을 일일이 다 뽑아내고 있다. 꽃잔디가 상석 주변에 발갛게 피어 있어서,
“다른 묘엔 꽃이 없는데 여기에는 꽃이 유난히 많네요.”
“고인께서는 꽃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묘 뒤쪽으로 벌겋게 녹슨 철구조물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불길 속에서 산화한 다섯 분의 피맺힌 절규를 고스란히 형상화한 조각품인데,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투각되어 음영의 효과로 글씨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망루 불길 속에서
사람이 죽어 내려왔던 날
그리고 냉동고속 355일
다시 또 그 이후 진실은 어둠에 묻혔고
눈물로 언 땅을 녹여 다섯 주검 묻었던 날
우리 살아서 기억하리니
바람조차 잦아드는 여기
산자들 뜨거운 마음 추스려 옷깃 여민다.
- “여기 사람이 있다.” 2011년 1월 20일 용산참사 2주기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 개선위원회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남김으로써 전태일은 또 다른 감동으로 독자에게 다가왔었는데, 전태일을 사랑했던 조영래 변호사는 너무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름다웠던 사람!! 이 시대의 양심들이 더욱 많이 필요한 이 어두운 세상에 다시 환한 빛으로 다가오시라.
전태일은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권리를 짓누르는 현실을 비판했다. 2007년 4월 1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 앞에서 분신했다. 한독택시 조합원인 허씨는 이날 오후 동료에게 건넨 유서에서 “굴욕, 졸속, 반민주적 협상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단다. 그는 노조활동 외에도 민주노동당 당원, 참여연대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낮은 자리에서 자본과 국가의 전횡을 비판해 왔으며 그에게 한-미 FTA는 인간의 권리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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