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안강에서 친구들(석일, 인국, 종현, 나)과 하룻밤을 놀고 돌아왔다. 사진 몇 장 정리한다. 저녁에 만나 오랜만에 술 한잔 하고 자정무렵 헤어져 셋은 호텔에서 종현이는 귀가해서 잠을 자고 아침 9시경에 다시 만났다.
상가에 걸린 태극기는 4.19혁명을 기념하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안강읍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이 보통이 아님을 알겠다. 그러나 안강시장 안의 썰렁한 분위기가 눈에 띈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이 안강 장날(4, 9일에 장이 서는 5일장)이니 매장을 노상으로 옮겨 장사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강 근교에는 흥덕왕릉이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송림 사이로 들어서니 옛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두 아들이 공을 따라다니며 뛰어놀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던 것이다.
능원을 지키는 무인 석상은 아라비아인(서역인)을 닮은 게 특징이다. '괘릉'(원성왕릉)에서도 서역인을 닮은 석상을 볼 수 있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귀부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일치하며, 왕릉 주위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신라 제 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무덤, 장화부인과 합장한 것으로 1963년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흥덕왕의 본명은 김수종(경휘)이며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이 재배하도록 하였다.
능 앞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넓게 조성되어 있어서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을 법하다. 다만 주변에 축사가 많이 생겨서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분뇨 악취가 심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았을 때는 악취의 방향이 이곳으로 향하지 않아서 좋았다. 잔디밭에 자리를 펴고 누워 한바탕 잠을 자고 싶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서 함께 잔디 위를 뒹굴던 세월도 30년 전이다. 이젠 그 젊디젊은 애비도 늙어서 흰머리 성성하고 목의 주름이 장난이 아니다. 검버섯도 점점 많아지고 골격에 붙었던 근육들도 많이 줄었다. 아, 세월이여!!
안강에서 태어나 안강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종현, 이젠 그도 늙었을 텐데 빵빵한 몸매는 아직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술도 여전히 잘 마시고 호탕함도 잃지 않았다.
우리 친구 인국, 사범대학을 나왔지만 일반직 공무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기에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쳐보지는 않았다. 워낙 성실하고 능력이 출중하여 4급 서기관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친구다.
잔치국수를 주문해 놓고, 부추전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을 걸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이렇게 1박 2일의 만남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다. 다음에는 어디에서 또 만나 즐겁게 하루를 보낼까? 유사인 종현이가 결정해서 연락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