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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치앙마이, 치앙라이 여행 2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8. 1. 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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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 다시 태국으로 돌아온 우리 일행 19명은 메콩강이 내려다보이는

중국식 식당에서 퐁요로운 부폐식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귀에 익은 팝송도 흐르고.....


도도한 강물의 흐름은 어디를 가든 역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세 나라의 갈등과 화합의 순간을 생각해 본다. 



치앙마이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들르게 될 고산족 마을은 식당에서 약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고산족 마을 입구의 사무실, 안내하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안내하도록 시스템화 된 것 같았다.


카렌족이 목을 길게 만들기 위해 평생을 차고 다녔다는 링, 그 무게를 가늠해 준다.


고산족 마을에 사는 여러 부족들을 소개하고 있는 김혜성 가이드,

관광 목적으로 이곳으로 초대된 소수 민족들에 대한 설명으로 보면 될 듯.....






아카족



아카족 할머니 몇 분과 함께..... 가운데 서 계신 할머니의 오른쪽 다리엔 무슨 사연이.....


라후족의 환영 의식, 고맙다는 표시로 지폐 한 장을 함에 넣으니 표정없는 라후족의 박수소리만 공허하게.....



우리 민족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라후족인데, 디딜방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살짝 들여다 본 라후족 가옥 내부


 카렌족은 직물 짜는 기술을 정평이 나 있고, 오늘 그 기술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선보이고 있다.


 친구가 여인네 옆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자세히 보니, 친구의 젊은 시절, 두 살 아래 여동생 영숙이를 매우 닮았다.

나의 고등학교 동기인 유선생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그 여동생과 대구 내당동에서 자취생활을 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계속해서 만나왔으니 나와의 인연은 깊다 못해 참으로 끈질길 정도다. 아, 옛날이여!!


카렌족 마을을 지나면서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가이드한테 묻고 있는 우리 일행들


태국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관련하여 인터넷 자료를 인용해 보면,

전국에 20여 개의 부족들이 있지만 그 중 몽족(Hmong)을 비롯해 라후족(Lahu),

리수족(Lisu), 아카족(Akha), 야오족(Yao), 까렌족(Karen)이 주요 부족이다.

까렌족은 타이 북부지역의 고산족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부족으로 고산족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은 타이 북부와 서부 국경 주변의 많은 주에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까렌족이

매홍손, 치앙마이, 치앙라이, 람푼, 탁강과 칸차나부리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여러 종류의 가축을 키우는데 코끼리도 그 중에 하나이다. 코끼리를 잘 다루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카렌족 여성은 직물을 다루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며, 미혼인 여성은 흰색의 긴 치마를 입고 결혼한 후에는

 주로 붉은색의 사롱과 셔츠를 입는다. 까렌족 남성은 바구니 등을 만드는 능력도 뛰어나다.

라후족을 타이인들은 ‘무서’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타이어로 사냥꾼을 뜻한다.

리수족은 주로 치앙마이, 치앙라이, 매홍손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몽족은 중국·베트남·타이·라오스 등 여러 나라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다.

아카족은 언어학적으로는 티베트버마제어에 속한다. 대부분의 아카족은 미얀마 북부와

라오스 북서부, 타이의 북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분포 때문에 이들이

중국의 남부 지방이나 티베트 지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왔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야오족 혹은 미엔족은 몽족과 함께 남부타이어족의 일종이다. 야오분화는 중국문화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중국처럼 새해 첫날을 축하하면서 전통적인 음악과 전설을 기록하는 데에 중국문자를 사용한다.


사진의 저 여인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나의 목은 짧기만 하다. 

 '모딜리아니란 화가는 왜 목이 긴 여인만 줄기차게 그렸을까?'


마을 여기저기에 재배 중인 커피 나무들, '아라비카' 란 이름의 커피의 산지가

이 주변이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옛날에는 주로 마약을 많이 재배하는 바람에.....



무슨 꽃일까? 고산족 마을 사무실 부근에서 발견했는데 열대식물의 현란함이 예사롭지 않다.


고산족 마을을 떠나 다시 치앙마이로 2시간 30분 정도를 달리다가 들른 천연온천,

온 마을이 수증기로 가득차 있을 정도의 관광지이지만 당국에서는 상품화 하지 않고 자연상태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다만 화장실 이용만큼은 유료(1인당 5바트)여서 그 수입이 괜찮을 듯.....



온천의 최고온도는 섭씨 98도 정도라고 한다.


치앙마이에 도착해서 김치찌개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저녁 식사 후 툭툭이를 타고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한 시티투어를 하기로 했다.




시가지 한복판에 남아 있는 성벽, 성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둘러싼 해자가 남아 있어,

옛 고대도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이것은 1296년 란나 왕국의 망라이(Mangrai) 왕이 가로 2, 세로 1.6에 걸쳐

지은 도시 성곽 중 일부이다. 성 안쪽에 20여 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거의 찾아볼 수 없단다.

    

왓 체디 루앙 사원,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탑사또는 위대한 탑의 사원'인데

얼마나 위대한 탑이 있길래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단 말인가?

입구를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붉은 빛을 발하는 엄청난 규모의 석조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이 바로 대탑 제디루앙임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기단의 한 변의 길이가 54미터로

한 바퀴를 다 돌면 200미터가 넘는 거리이다. 이 넓은 기단부가 떠받쳤던 탑의 높이는 무려 90미터!

15세기 중엽 지진으로 무너져 내려 지금은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고 벽감(Niche)부만 볼 수 있다.


이 사원은 란나타이 왕국의 일곱 번째 왕인 샌무엉마왕이 부왕의 유골을 봉안하기 위해

유골봉안소를 만들면서 창건, 처음에 다음과 같은 의식을 거행했다고 전해진다. 먼저 부지를 깨끗하게 하고,

그곳에 가지는 은, 잎사귀는 금으로 만든 의례용 보리수나무를 세웠다. 다음, 그 주위에 금불상과 은불상을 놓았다.

그리고 그 부근에 유골봉안소의 기단을 만들었다. 부처님의 유골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이 때는

제디 루앙으로 불리지 않고 꾸 루앙(Ku Luang)’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유골 봉안탑이 완공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샌무엉마 왕이 죽고, 그의 아내인 왕비가 건축을 계속하였으나 무너져 내렸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샌므엉마 왕의 손자인 틸로카랏왕(재위 1441-1485) 때이다.

틸로카랏왕은 홍토를 이용하여 기초를 보강함으로써 90미터의 대탑으로 변신시켰다.

 ‘제디루앙이라고 하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때이다.


틸로카랏왕은 초대왕 멩라이왕에 이어 란나타이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평가된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전개하여, 사완칼록, , 프래, 치앙룽 등을 점령한 바 있다.

90미터의 대탑을 만든 것도 당시 란나타이 왕국과 틸로카랏왕의 위상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는 1434년에 치앙라이에서 발견되어 람팡에 보관 중이던 에메랄드불상을 1468년에 치앙마이로 옮겨

바로 이곳 제디루앙에 봉안토록 했다. 이 탑 기단부의 사방 중간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수호상이 서있다.

왕관을 쓴 (Nak: )’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은 악어처럼 생긴 동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동물상을 마카라(Makara)’라고 하는데 불교의 수호신 수천(水天)이 타는 바다동물로서 풍요를 상징한다.

입에서 다른 낙을 뿜어 내는 마카라는 란나 사원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특히

성스러운 불당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지키는 수호상으로 널리 발견된다.


이 사원에서 또 이목을 끄는 것은 경내에 서있는 큰 나무이다.

이 종류의 나무는 태국말로는 마이양이라고 하는데 학명은 ‘dipterocarpus alatus’이며 열대수목으로서 큰 키가 특징이다.

태국의 교외지역을 지나다 보면 들판에 또는 도로변에 우뚝 서있는 이 나무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마이양나무는 완전히 성장하면 높이가 30-50미터에 달하여 독야청청 높고 곧은 모습은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치앙마이의 야채시장, 배추 20포기 정도가 들어있는 비닐봉지 하나가 80바트, 2500원 정도로 싸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야시장도 한참을 돌아다녔다.





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버스를 타고 가이드가 안내하는 라텍스 판매점에 들렀다.


최신형 송테우를 타고 치앙마이 가까이 위치한, 왓 프라탓 도이수텝을 가 보기로 했다.

버스로 가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구불구불한 길을 25분 정도 오르내려야 하니까.....


왓 프라탓 도이수텝, 치앙마이 대표의 관광지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1383년 세워진 유서 깊은 사원으로, 태국의 사원 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사원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불교성지 순례자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이곳을 보지 않고서는 치앙마이를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치앙마이에서 상징적인 곳이다. 치앙마이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인 도이수텝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산 아래에서도 낮에는 물론,

밤에도밝은 불빛에 비춰진 사원의 웅장함을 볼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우리 일행들은 불행하게도 안개에 싸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자료를 참고해 보면, 아래와 같은 설명도 있다.

도이수텝산은 치앙마이 서쪽 15km 지점에 있는 높이 1,677m의 성스러운 산이다.

사원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1383년에 세워졌다. 300개의 긴 계단을 따라 사원에 오르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계단 양쪽에 있는 3색 타일의 꿈틀거리는 용이 유명하며,

천장이 없는 불전 한가운데에 황금탑이 솟아 있다.

주변에는 우산 모양의 정교한 금세공 장식이 4개 서 있다.


''은 사원 '도이'는 산 '수텝'은 신선 또는 은둔자의 뜻이며 '프라탓'은 왕실에서 지정한,

즉 왕실이 관리하는 사원의 이름 앞에 붙이는 말로 태국 사원을 여행하다가

'프라탓'이란 이름이 붙은 사원은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면 된다.

정리하면 왓 프라탓 도이 수텝(Wat Phrathat Doi Suthep)은 왕실이 지정한

신선이 노니는 수텝산 위에 있는 사원 이라는 뜻이다.


사원 경내에서는 신을 신어서는 안 된다. 신성한 지역인 만큼 옷차림도 제약을 받는다.

태국인들이 신성시하는 사원이므로 짧은 바지나 무릎이 드러나는 치마는 삼가야 한다.



사원을 오를 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고, 내려올 때는 300여 개의 계단을 걸어서 내려왔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는 한 학생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면서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브라질에서 왔다는 학생들이 깊은 관심을.....


다시 송테우를 타고 치앙마이 시내로 돌아왔다. 왓 수안 독을 들르는 순서가 남아 있었다.


왓 수안독(Wat Suan Dok) Wat Suan Dok literally means “flower garden temple”

Suan" means garden or park and "Dok" is shortened from "Dok Mai"; the Thai word for flower.

치앙마이시의 서쪽에 치앙마이 대학으로 가는 수텝거리에 있다.

 ''꽃밭의 절''이라는 뜻으로 란나(Lanna) 타이 왕가의 정원이었던 곳이다.

1371년에 세워졌으나 불전은 1932년에 재건된 것이고, 내부의 불상은 약 500년 전의 것이다.

불전 내부에는 커다란 청동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불전 오른쪽 뒤에 큰 체디 세 개가 있다.

경내에 가득 찬 크고 작은 흰색의 체디에는 역대 왕들의 유골을 모셨다고 한다.


우빠꿋(Phra Upakut)스님의 불상을 보면 한손을 발우(스님들의 밥그릇)에 넣고 있는 특이한 모양으로, 이는 스님의 발우는 아무리 음식을 꺼내도 음식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여기며 이것이 오늘날 부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치앙마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옛날에~주변(지금의 쌍캄팽 지역)에 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매일 밤 자정 무렵이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새벽시장(지금의 나이트 바자 위쪽에 있는 무앙마이 새벽시장)으로 장사를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노부부는 매일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하고 헛걸음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노부부는 시장에 가기 위하여 지금의 왓 우빠꿋(Wat Upakut)앞으로 지나 가다가 한 동자승을 만나게 되었다. 보통 스님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밤늦은 시간에는 외출을 삼가하고 있는데 그것도 동자승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길에 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긴 노부부는 동자승에게 어디에서 오셨냐고 물었다. 동자승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냥 노부부만 바라 보았고...

자정 무렵에 발우(스님들이 탁발할 때 사용하는 그릇)를 매고 있는 동자승의 모습을 가엽게 여긴 노부부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동전 두개(2바트)를 발우에 넣어 드렸다. 그리고 동자승은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일이 있던 날부터 노부부는 시장에 내가는 물건마다 모두 팔리게 되었고 이내 큰 부자가 되었다. 갑자기 큰 부자가 된 노부부를 신기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게 되었고 노부부는 그 동자승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노부부는 수소문을 하여 그 동자승을 찾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도 그 동자승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노부부는 동자승을 만난 자리에 그 동자승을 위하여 사원을 짓게 되었고, 후에 인도에 그렇게 부를 상징하는 발우를 들고 다니는 비슷한 모습의 전설적인 스님(우빠꿋(Upakut)스님)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동자승을 우빠꿋 스님의 화신으로 믿게 되어 사원 이름을 왓 우빠꿋(Wat Upakut)이라 하였다. 또한 노부부가 동자승을 만난 날이 보름날인 수요일이었다하여 매년 보름날과 수요일이 겹치는 날이면 치앙마이 사람들은 이 사원을 찾아와 불공을 드린다. 란나어(치앙마이어)"뺑 풋"(보름+수요일)이다.

왓 쩨디 루앙에도 우빠꿋(Upakut)스님의 불당이 따로 마련되어 "뺑 풋"행사를 열기도 한다.

연꽃모양의 좌단에 앉아서 한 손은 발우에 넣고 있고 고개를 비스듬히 하늘(태양)을 향해 들고 있는 모양의 특이한 불상이다. 이 불상을 만나면 그 자리에 동전 두 개만 시주하라!...그럼 부자 된다.- 인터넷 인용






거대한 보리수나무,


역대 왕들의 유골을 모신 크고 작은 흰색의 체디



김혜성 가이드의 아내는 치앙마이 교민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꿀산업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다.

남편의 친절함이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소지으면서 건네는 말씨가 아주 나긋나긋하고 고우며,

예의바른 행동거지로 보아서 회사의 홍보대사로서는 아무런 손색이 없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김대장, 장가 잘 들었네. 그대보다 서너 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흠이 되지 않아요. 쌍둥이 아빠 화이팅!'

프로폴리스 하나를 3,300바트를 주고 하나 사야했다. 필요해서 샀다기 보다는 그냥 사 준 것에 가깝다.^^

치주염에 좋고, 건강에 좋다고 하니 믿고 소량을 조금씩 조금씩 복용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날의 점심은 한식이었다. 골프 관광객들이 3년 전부터 자주 드나드는 식당이라고 한다.

종업원들이 다소 굼떠서 가이드가 직접 써빙을 해야 할 정도이지만 음식 하나는 맛있어 자주 찾는단다.


카페 망고에 들러 아라비카 커피를 마셨다. 평소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내가 원두를 갈아 진공포장을 해서 함께 여행하는 동료들에게 선물하라고 건넨 드립커피와 비교된다고나 할까?

드립백을 뜯어 컵에 걸친 뒤, 따뜻한 물을 조금씩 떨어뜨려 우려먹는 향기 짙은 커피맛을 본 사람이라면.....^^



보상 마을(The village of Bosang), 치앙마이에서 동쪽으로 9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우산과 관련된 공장과 상점에서 일할 정도로 우산 공예가 발달했다.

우산 손잡이 세공, 우산 살 만들기, 우산 덮개 제작, 문양 그려 넣기 등이 분업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제작 공정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장인이 그려 내는 다양한 문양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요청하면 원하는 색깔의 우산을 제작해 주기도 한다. 1월에 보상축제가 열린다.

이 밖에 은세공, 목공예 등 수공예와 관련된 공장과 상점이 위치해 있어 장인의 도시로 불릴 정도다.



소수 민족의 하나인 몽족들이 주로 이런 일을 맡아 하고 있단다.


가장 큰 우산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우산도 보인다.







두 번째로 진행되었던 전신맛사지 현장, 나는 제일 덩치가 큰(약 90킬로 정도) 여인으로부터

두 시간 동안이나 맛사지 서비스를 받았는데 압박의 고통을 내색하지 못하고 잘 참아내야 했다.

게다가 그 여인은 감기에 걸렸는지 잔기침을 뱉아내곤 했다. 혹시 감염이라도 되면..... 휴~


태국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 현지식이었다. 음식 이름이 따로 있는데 기억나지는 않고 제법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난 뒤에 가이드가 제공하는 망고 서비스는 마지막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는 치앙마이 공항으로 급하게 이동했다. 발맛사지를 전신맛사지로 바꾸면서 한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출국 수속 절차가 예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어서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겼다.

환전해 갔던 태국화폐 바트를 남김없이 써야겠다 싶어 몇 군데 상점을 돌아다니다가 베개와 아라비카 커피를 샀다.

제주항공 7C4206편에 오르니 피로감이 밀려온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바로 옆에 앉은 상인 샘과 잠시 얘기하다가.....

 한밤중의 귀국이라서 그런지 5시간 정도는 계속 잠을 잤던 것 같다. 40분 뒤에 인천공항에 착륙할 것이라는 기장의

기내 방송이 없었더라면 아마 더 잤을 지도 모른다. 잠을 깨고 나니 3박 4일의 태국여행이 꿈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에 올라 한 순간에 잠이 들어 여행하는 꿈을 꿨고, 그 동안 꿈속을 헤매고 다니다가 방금 깨어난 듯한.....


 잠에서 깼을 때 상인 샘은 눈을 감고 있었다. 툭툭 치면서 뭐라 말을 거니 눈을 뜨고 귀마개를 빼면서 반응을 보인다.

 비행기 엔진 소리가 귀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닌게 아니라 코를 심하게 고는 나와 3일간이나 함께 자면서

그 고통을 견뎌야했으니 오죽했으랴.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코골이에 신경쓰여서 밤새 잘 잤느냐고 물으면

너무 잘 잤다면서 안심시켜 주었던 분, 3년 전에 아시아나 항공사에 전격적으로 취직된 딸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다.

따님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부모님을 닮았으면 틀림없이 인물이 보통이 아닐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진로직업체험 중에 항공기승무원 관련 체험을 진행했던 나의 소감과 항공사 간의 불평등한 대우 등도

언급되었다. 노동강도가 심하기도 하지만 고객들의 감정상태까지 돌봐야 하는 감정노동자이기도 해서

대우를 제대로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 봉급의 많음보다는 복지 분야의 혜택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등.

 

새벽 5시 20분, 화물을 찾아서 남쪽 나라에서 입었던 얇은 옷을 벗고 두꺼운 겨울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인 샘과 내가 항공기승무원을 주제로 얘기를 한 것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시카고에서 인천공항 도착까지 13시간의 긴 근무를 마치고 이제 막 귀국한다는 상인 샘 따님의 메시지가 도착,

예기치 않게 조금 있으면 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며 기쁜 소식을 전한다. 이런 우연도 있네그려.^^


어찌 이 장면을 놓칠 수 있겠는가? 두 부녀의 상봉 장면을 찍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따님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이렇게 예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을 둔 상인 샘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고 지원해 주는 상인 샘의 사랑이

열매를 맺은 듯, 인천 국제공항에서 풋풋하게 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 7시에 인천을 출발해서 구미에 도착하는 리무진 버스 차표를 끊어놓고 공항 내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타이란 나라의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했던 여행이었기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인터넷 자료를 인용해서 관련된 사실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타이족은 중국 남부에서부터 라오스, 타이, 미얀마, 말레이반도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타이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한족(漢族)의 남진에 의해 중국의 양쯔강 남부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이동하여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 윈난[雲南]의 남소국(南詔國)이 타이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라는 설이 있으나 반론도 많다. 최근 타이 북동쪽 메콩강 연안에서 BC 5,00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문화의 유적이 발견되어 타이족의 계속 거주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 논쟁이 일고 있다.

13세기에 이 지역에 먼저 거주하던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북부 타이의 란나타이 왕국(타이유안족), 수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중부 타이의 수코타이 왕국(시암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에 걸친 란쌍 왕국(라오족) 등 타이 민족의 소왕국이 각지에 생겨났다.

그 중 랑나타이 왕국은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타이 역사상 정통 왕조는

수코타이 왕조(1257~1350)를 꼽는다. 수코타이 왕조의 제3람캄행왕(재위 1277~1317)

영토를 넓히고 크메르 문자를 개량하여 타이 문자 표기법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수코타이 왕조에 이어 아유타야 왕조(13501767)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

17세기에 아유타야는 무역항으로 번창하여 왕실의 독점무역체제를 갖추고 서양 여러 나라 및 중국·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16세기 후반 미얀마군()에 점령당하였으나 나레수엔왕(재위:15901605)이 왕조를 부흥시켰다.

그 후 1767년에 다시 미얀마 군대에 점령당했으나 아유타야 왕조의 무장(武將) 프라야 탁신[鄭昭]

미얀마를 격파하고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톤부리 왕조는 1()로 끝나고, 그 부하인 장군 차크리가 1782년에

방콕에서 왕조를 창시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차크리 왕조(방콕왕조)이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열강들의 압력이 드세어져 1855년에 영국과 보링 조약을 맺고 자유무역항과 치외법권을 승인하였다.

출랄롱코른왕(라마 5)은 사법·행정제도 개혁과 함께 근대화를 실행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여

식민지화의 위기를 벗어났다. 그 뒤 왕족 전제(專制)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지자 1932624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국으로서 발족하였다.

타이는 아시아 각국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던 시기에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나라이다.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97년 개헌으로 20003월 임명직 상원이 해산되는 등

제도상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200166일 선거에서 탁신이 만든 새 정당인 타이락타이당이 전국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탁신은 총리가 되었다. 탁신총리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기업인출신으로 집권초기 신임을 받았으나

본인의 부정부패가 문제가 되면서 2006년 쿠데타를 불러왔다. 15년만에 다시 발발한 군부쿠데타는 태국 문민정치가

아직 미성숙 되어 있고, 60년 이상 계속된 군부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란나 타이(Lanna Thai)에 대한 기록을 더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20세기 초 태국에 완전히 합병될 때까지 약 600여 년간 태국 북부지역에 존재했던 왕국이며 정치적 연합체의 성격을 갖는다.

치앙마이, 람푼, 람팡, 프래, , 파야오, 치앙라이, 치앙센 등이 여기에 속하며 치앙마이가 그 중심이었다

란나타이는 13세기에 멩라이’(Mengrai. 재위 1259-1317)라고 칭하는 인물에 의해 수립되었다.

멩라이는 치앙센 부근 언양(Ngoen Yang) 출신의 왕으로서 용맹한 야심가였다. 즉위 후 그는

연합-전쟁-개척의 수단을 적절히 섞어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도모하게 되는데,

1262년도에 자기 이름을 딴 치앙라이(Chiang Rai)를 건설하여 수도를 이전하였고,

1281년에는 남부의 몬(Mon)족 국가 하리푼차이(오늘날의 람푼)를 정복하고,

1296년경에는 치앙마이와 람팡 및 파야오를 그의 영토에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멩라이왕은 단순한 정복자만은 아니고 협상가이기도 해서 이웃국가인 수코타이의 람캄행 대왕과도 교분이 깊었으며,

후에 란나타이의 수도가 되는 치앙마이를 건설할 때 그를 초청해서 자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란나타이는 국가 수립 후 약 200년 만인 1558년에 버마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독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15세기 초 아유타야가 중부 태국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등장한 이후 아유타야-버마간 경쟁과 충돌이 불가피해졌고,

1558년에 란나 점령을 통해 전초기지를 확보한 버마군은 마침내 1569년경 아유타야를 함락시킨다.

란나타이는 1578년부터 버마인들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됨으로써 버마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16세기 말경 아유타야는 나레수안이라고 하는 영웅이 버마를 몰아내고 국권을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란나타이는 버마와 아유타야 사이에서 약 200년 동안 양국간 세력다툼의 볼모가 되었다.

란나타이의 이 같은 운명은 18세기 후반 아유타야가 버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 이후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1767년에 아유타야가 멸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유타야의 남은 세력들이 버마를 태국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톤부리 이후 차크리)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에 버마와 갈등을 빗던 란나 지역의 통치자들이 버마로부터

등을 돌려 태국과 힘을 합쳐 버마를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태국으로부터 정치적인 자치권을 부여 받게 된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버마와 라오스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태국은 란나를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1939년 마지막 통치왕자가 죽자 중앙정부에서 주지사를 파견함으로써 마침내 란나는 태국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태국의 한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북부 태국은 란나라는 명칭으로 중부 태국과는 많이 다른

어떤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인정받고 있다. ‘란나문화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선,

란나는 백만 개를 의미하는 과 논을 의미하는 의 복합어이다. 따라서 란나는 백만 개의 논을 의미한다.

이웃국가인 라오스는 과거 란창(란쌍)’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백만 마리의 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란나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명칭 그대로 비옥한 농토가 곳곳에 펼쳐져 있는데 겹겹의 산(소수민족의 요람이기도 하다)

다양한 강으로 이루어진 자연 환경적 조건으로 인해 많은 수의 도시국가를 양산했고 오랜 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보존해 올 수 있었다.

20세기 초 이 지역에 방콕으로부터 연장된 철도가 놓임으로써 비로소 중부 태국과의 통합이 가능해진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초 란나 지역에 먼저 거주하고 있던 민족은 몬(Mon)족들이었다. 몬족은 한 때 태국 땅 전역을 지배했던 민족인데,

이들이 태국 땅에 구축한 정치적 연합체를 다와라와디(Dvaravati)’라고 부른다.

 11세기경부터 크메르족의 지배 확대 및 타이족의 남진으로 태국 땅에서의 이들의 세력은 점차 사라져 갔다.

란나타이가 강대국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닌 몬(Mon)족의 국가를 정복한 것이다.

현존하는 란나 문화유산 중 초기 문화유산의 상당수가 바로 이들이 직접 남겨 놓거나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초기의 란나는 몬족의 영향 이외에도 이웃국가였던 수코타이와 버마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점차 고유성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 시기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초까지이다. 이 때 탄생한 것이 높은 기단, 뚜렷한 몰딩,

작은 유골봉안실(탑에서 종처럼 생긴 부분)을 그 특징으로 하는 란나 특유의 제디탑이다.

버마에 의해 정복된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까지 약 200년간 란나문화는 정체기를 맞았으나,

버마로부터 벗어나 재건이 시작된 19세기 이후부터는 새로운 중흥기를 맞는다.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인

중부 태국으로부터의 문화유입은 물론, 티크나무를 중심으로 한 목재무역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외래문화도 빠른 속도로 유입되었다.

이같이 다양한 외래문화가 지역 고유의 전통문화에 스며듦으로써 란나문화는 더욱 독특한 색채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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