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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꾼 허균

세상과 함께

by 우람별(논강) 2009. 9. 2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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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 최고의 천재, 허균 -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교산 허균은

조선 중기의 학자· 문인· 정치가로

1569년(선조 2)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불꽃처럼 살다가 

1618년(광해군 10) 역모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허균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이름 높은 문벌가로서

부친 허엽은 서경덕의 문하이며 동인의 영수였고

두 형인 허성과 허봉은 뛰어난 수재였으며 

누이 또한 시재를 떨친 여류시인 허난설헌이고

막내로 태어난 허균은 이들 '허씨 5문장가'중 가장 빼어난 천재였다.

 

허균은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허균은 당대 천재 문장가였다. 

 

"오직 문장의 재주로 세상에 용납되었다."

                                                   -<선조실록, 선조32년, 5월 25일> 

 

"허균은 문재가 극히 높아 붓만 들면 수천 마디를 써냈다."

                                                    - <광해군일기, 광해6년 10월 10일>    

  

그의 뛰어난 문장력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빛을 발한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6차례 방문하며

학식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짓는 문사들이 담당하는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 뜻을 통하는 조선의 외교 방식인

수창외교(酬唱外交)를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엔

명나라 사신 오명제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시인이기도 한 그가 조선의 시를 구하자,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과 더불어

그가 외우고 있는 조선시를 들려주게 되고 

오명제는 돌아가 <조선시선(朝鮮詩選)>을 저술하게 된다. 

 

"허균이 영민해서 시를 한번 보면 잊지 않아

동방의 시를 수백편이나 외워주었다."

                                                          - <조선시선(朝鮮詩選) 서문>

오명제가 지은 <조선시선(朝鮮詩選)>은

신라때 최치원, 백결선생부터

고려의 이규보, 정몽주,

조선의 정도전, 서거정, 김종직, 허매씨 등

108분의 한시,

332편으로 엮어져 있고,

책 끝머리에 '조선장원 허균서'라고 표기되어 있으니

허균의 공로로 우리나라의 시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이다.

 

       < 조선시선 (朝鮮詩選) >

- 조선시선에 실려 있는 수백편의 시는
   허균이 외워 소개한 시였다.

 

1606년. 

주지번과 양유년 등 명의 사신들을 맞아

누이 난설헌의 시를 소개하는 등 화답시를 나누었는데

옛 고서를 외우는 허균을 보고

사람들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여우나 삵쾡이, 쥐 같은 짐승의 정령일 것이다.”
                                                                                      - < 어우야담 中 >

 

 

2. 허균, 조선의 이단아 - “나는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不如世合)”

 

선조는 허균을 아꼈다.

임란때 훌륭히 수행해낸 사신 접대와 중국 사신행으로

형조정랑, 삼척부사, 공주목사 등에 제수받지만

허균은 20년 공직 생활에

3번의 유배와

6번의 파직을 당한다.

 

허균은 지나치게 자유분망했다.

1599년 31세의 허균이 황해도사에 부임해가면서

서울에서 황해까지 알던 기생들을 데려간 것이 문제가 되어

6개월만에 해임 당하게 된다. 

 

"허균은 행실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다"

                                              - <선조실록, 선조32년 5월 25일> 

 

또한 허균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해윤판관을 지낼 때 쓴 일기 <조관기행>에는

언제, 어디서, 어떤 기생을 만났는지

잠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심지어 기생 한 명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관리들의 일화까지 기록했다.

 

"기생 내기가 잠자리에서 내게 물었다." - <조관기행>

 

"기생들이 인사를 해 바라보니

내 방에 왔던 자가 12명이었다." - <기유서행>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나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 수 없다." 

(男女情欲天也 倫紀分別 聖人之敎也 

我즉從天而不敢從聖人) 

 

허균의 이러한 솔직함과 자유분망함은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 양반 사회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허균은 불교에도 심취한다.

사명스님은

허균이 18살때부터 열반하실 때까지 깊게 교류한 분이었다.

 

"비록 허균이 유교 집안 사람이지만

허균과 사명 스님은 제형지교(弟兄之交)로서

허균만큼 사명스님에 대해 깊이 아는 자가 없다(知師最深)."

                                                - 경남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당 비문>

 

"허균은 밥을 먹을 때면 식경을 외고

항상 작은 부처를 모시고 절하면서

스스로 불제자라고 자청하니

승려가 아니고 무엇인가." - <선조실록, 선조40년 5월 5일>  

 

허균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수안군수에서 파직되고

삼척부사에서도 임명 13일만에 해임된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에 심취한 허균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허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자 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야 할 것이오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

                                        - 삼척부사 부임 13일만에 파직 소식 접하고서,

                                           <성소부부고 권2>

 

"나는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를 지어 배척하므로

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없고 밖에 나가도 찾아갈 만한 곳이 없다."

(許子性疏誕 不與世合

 時之人群罰 而衆斥之

 門無來者 出無與適) 

 

 

3. 허균이 꿈꾸는 세상

    -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

 

허균은 성리학 체제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중국행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불교, 도교, 양명학은 물론 서학을 접하게도 된다.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 사신으로 갔을 때는

천주교를 접해

서양지도와 함께

천주교 찬송가 <십이궤장>를 가지고 온다. 

 

또한 조선이 세계를 만나는 유일한 창고인

중국 고서점거리 유리창에서

은 1만냥을 들여 4천여 권의 책을 사온다.

허균은 새로운 세상에 목말라하는 신지식인이었다.

 

이리하여 허균은

이탁오(李卓吾1527~1602)을 접하게 된다.

 

명나라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이탁오는

불교와 천주교를 믿고 교류한 유교의 이단아로서

성리학의 절대시하는 전통 사회를 부정하고

상대적이며 주체적인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여

중국에서 매우 급진적 인물로 비난받고

'괴물'로 박해받다가

결국 자결하고 만다.

 

이탁오의 책은

명나라 멸망후 청나라에서도 금서였으나

허균은 그 책을 구해 서슴치 않고 읽었다.

 

"이탁오의 책은 불태웠으나

그의 도는 여전히 다 태우지 못했고

세상에 원래 그릇된 논의가 분분한 법이다."

( 淸朝焚却禿翁父 其道猶存不盡焚 世間橫義自紛分)

                                                        - 을병조천록중 이씨분서를 읽고-

 

허균 역시 조선의 이단아가 되어갔다.

그는 다양한 세상과 사람들을 만났고

피부로 세상의 모순을 실감했다.

 

허균의 스승은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당대 3당(唐) 시인이라고 불린

서얼 출신의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인데,

 

허균은 스승을 통해

서얼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그들을 후원하며

사회 부조리에 더욱 눈을 뜨게 된다.

 

그는 1607년 공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서얼 친구들을 초대한다.

 

"내 마땅히 녹봉의 절반을 덜어서 자네를 부양하겠네.

재주가 내 열 배는 뛰어나지만 세상에서 버림받으니 나보다 심하네.

빨리 와 주게. 자네가 와서 비록 비방을 받는다 해도 내 걱정하지 않겠네." 

(吾當以半 俸餉之 才寔十倍 而世之棄有 甚於僕 

 -來-來 雖以此得謗 吾不-也 )

                                                        - 서얼 친구 이재영에게 보낸 편지

 

"허균이  공주 관아에 '삼영(서얼 이재영, 윤재영, 심우영)'을 설치했다"

                                                                  - <광해군 일기, 광해9년 12월>

 

결국 이 일로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9개월만에 또 파직 당하게 되고

나주목사 자리도 취소되면서

부안에 내려가 <홍길동전>을 쓰게 쓴다.

 

홍길동

연산군때 실존했던 인물로

전남 장성군에는홍길동의 생가가 있고,

허균의 소설을 통해

100여 년만에 부활한 것이었다.

 

그가 쓴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서자 홍길동이 부패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로

그가 본 세상의 불합리를 극복하고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그의 개혁 사상이 표출된 것이다

 

"강도 홍길동이

옥정사와 홍대 차림으로 첨지라 지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6년 12월 29일>

 

 

 

 허균 <홍길동전> - 최초의 한글소설

 

 

또한 전남 함양 유배시절에 쓴

<성소부부고(-?藁)>에는

재능엔 천함이 없다는 '유재론((遺才論)'과

세상을 바꾸는 힘이 민중에 있다는 '호민론(豪民論)'이 나오는데,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허균의 선구적인 개혁 사상을 볼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재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아서 인재가 드물다.

그런데도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이 아니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

(爲國家者 所與共理天職 非才莫可也

 我國地편 人才罕出

 用人之제尤狹 非世胃華望 不得通甚賦) 

  

"한사람의 재주와 능력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귀한 집 자식이라 해서 재능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며

천한 집 자식이라 해서 인색하게 주는 것도 아니다." 

(天之賦才爾均也 不以貴望而豊甚賦 不以側陋而장其- )

                                                   - '유재론(遺才論)'

  

"지금 백성의 원망은 고려말보다 훨씬 심하다.

견훤, 궁예 같은 호민이 나온다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는가."

 

"백성은 세 부류가 있다.

관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항민(恒民)과

세상을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호민(豪民)이다."

 

"호민(豪民)은 가장 두려워할 자로서

잠자는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이다.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면

호민이 앞장서서 항민. 원민을 선동하여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위하지 않고

자기 욕심이나 채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 

 

"세상을 바꾸는 힘은 민중에 있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  '호민론(豪民論)'

 

  

 

 

 < 성소부부고(-?) > - 유재론호민론이 실려 있다.

 

 

 4. 칠서지옥(七庶事件사건과 허균!

 

조선은

첩의 자식인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허용치 않는

이른바 '서얼금고법(法)'이었다.

 

이것은 소수의 양반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 하기 위해

지배층내에서 다시 

중인과 서얼을 희생양으로 격하 시킨 제도라 볼 수 있다.

 

임란을 맞이하여 국가 재정이 궁핍하자

납속책(納粟策)과 공명첩(空名帖)을 통해

일시적으로 서얼의 관직 등용을 허용했으나

임란이 끝나고 다시 그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1613년.

광해군 때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난다.

 

명문가 서자 7인이 

정계에 진출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소양강 위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스스로를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부르며 지내며,

 

광해군 즉위초에

서자도 관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연명상소했다가 허락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문경새재에서 은상인의 돈을 강탈 하다 붙잡힌 사건이다.

 

이들을 심문 과정에서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복위 시키려 했다는

역모가 드러나게 되고,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 상대적으로 명분이 약한 광해군을 빌어주던 소수 대북파가

이 사건을 빌미로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를 제거하고 

결국 어린 영창대군을 강화도 유배시켰다가 증사(蒸死)시키며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평소 7서자와 친분이 있었던 허균은

대북파의 이이첨과 손을 잡고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서며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위기를 모면할 뿐 아니라

정2품 좌참찬에 오르며 권력의 핵심에 서게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서얼출신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서얼금고법(法) '이 실려 있다.

 

 

 

5. "할 말이 있다!~~"

     -그러나 무참히 능지처참() 당하는 허균 

 

1618년 8월 10일 새벽.

남대문에 흉서가 붙는다.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죄를 벌하러

하남대장군이 장차 이를 것이다.

(弔民伐罪 河南大將軍至云)"

  

이 사건의 배후로 

허균이 지목되고

대신들은 강력하게 사형을 요구한다. 

 

허균이 투옥되자

성균관 유생들이 거리로 나와 반발하고,

하급 관리와 무사들, 노비들이 중심이 되어

의금부 앞에서 항의하고 돌을 던지며 

허균을 탈옥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허균이 애초에는

의창군을 추대하는 것으로 계획을 삼았으나

나중에는 허균이 스스로 하려 했다"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 8월 25일>

 

허균 진상조사 결과라고 밝혀진 내용이었고

대신들은 대질 심문없이 당장 허균을 죽이라고 상소했다.

 

결국 1618년 8월 24일.

허균과 가까이 지내던

김윤환과 우경방이 자백함으로서

허균은 붙잡힌 지 3일만에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할 말이 있다(欲有)"

 

그러나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삼복계(三覆啓)'의 적법한 절차도 없이

사형 집행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죄인 자백도 없이

'광해군을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은 일사천리로 집행되어

1618년 8월 24일

허균은 능지처참 당했다.

 

그의 사후에도

진상 조사는 3개월간 더 이어졌고

관련자들은 유배나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5년후(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역모죄로 몰린 사람들의 대부분 복권 되었으나

허균만은 예외로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복권 되지 못했다.

 

“그는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역적 우두머리 허균은

행실이 개, 돼지와 같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 도리가 전혀 없다.

(逆魁許筠 行類狗시  瀆倫縱淫 無復人理)"

                                      - <광해군 일기, 광해 10년 9월 6일>

 

허균은 의금부 투옥 하루전

외손자 집에 그의 책을 숨긴다.

<성수시화 (惺?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은 그렇게 하여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원산면에 허균의 가족묘가 있다.

그러나 허균의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다.

능지처참 당했으므로

그의 머리 ·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몸통의 순서로

6개 부분으로 찢어

각지에 보내졌으므로

시신은 수습되지 못한 것이다

 

 

6. 허균과 함께 스러진 그의 꿈.

- 조선 사회 절대 권위에 도전했던 허균.

 

허균은 조선의 이단아였다.
 

허균의 죽음과 함께

그가 이루고자 하던 그의 꿈도 사라졌다.

 

조선 사회 절대 권위에 도전했던 허균.
그가 진정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적 명분론만을 절대시 하는

양반 관료 사회의 신분 지배 질서가 아닌,

 

서얼, 무사, 심지어 승려 계급과 호민들까지 중심이 되는

새로운 평등 사회를 꿈꾼 허균.

 

학문과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했던 허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민중에게 있음을,

사람 사는 세상의 기본과 원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400년 전에 이미 인본주의, 민주주의를 인식한 허균의 꿈은

 

조선 후기 이익, 이수광 같은 실학자들에 영향을 주고

개화사상, 신분제 폐지 등

수난의 근대화속에 스며들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빛이 되었음을.

 

오늘날 여전히 같은 꿈을 꾸는 많은 이들의 희망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강릉 사천 바닷가에 교문암이 있다.

 

바위밑에 엎드려 때를 기다렸지만

끝내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두동강이 났다는 이무기의 전설.

 

허균은

시대를 앞서가다 좌절 당한 이무기가 아닐까.

 

 

<허균이 태어난 강릉 사천 교문암.
이무기가 떠나면서 두 동강이 냈다는 전설이 있다.>
 

                  

                                                                                - 한국사전을 보고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현재라고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 언제나 행복하시고~

   평온하시길 기도합니다~ 

 




 

 

  

 

출처 : 바람재 들꽃
글쓴이 : 황금마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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