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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정현종)

작가들의 세계

by 우람별(논강) 2009. 8. 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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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 2004년 제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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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의 이건희 씨가 선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휘호가 이 ‘경청(傾聽)’이다. 그는 실제로 말을 아꼈으며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는 습관을 몸으로 익혔다. 이 경청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다양한 고급의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겠고, 그 정보는 삼성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영 마인드는 그룹 전체에 영향을 끼쳐, 삼성의 정보력은 국가 정보기관보다 정확하고 막강하다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소중한 경청의 효과는 확고한 리더십이었다. ‘리더십은 웅변보다 경청에서 나온다.’는 신념이 곧 경영교훈이 된 것이다. '귀 기울여 들으면(以聽)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得心).'는 게 선대 회장의 가르침이었다. 최근 부정적인 일련의 소송과는 무관하게 삼성이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이고 대외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브랜드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 요인이 이 ‘경청’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대가 경청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대는 명상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배운 것이다’라고 오쇼 라즈니쉬는 말했다. 경청은 명상의 해독뿐 아니라 세상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서편제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뛰어난 소리꾼을 만들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대목이다. 눈의 감각을 차단시켜 귀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라는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현대는 온갖 말과 정보의 홍수 속에 있다. 통째로 먹혀들지 않으니 자꾸만 귀는 먹먹해져간다. 그렇게 귀가 멀다보니 자기주장과 주의만 있고 남의 소리는 귀를 기울일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걸 다 들어야 경청을 잘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분별력을 갖추지 못할 때 이들은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분별력은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자기 안의 탐욕 때문에 수많은 비판과 경고가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시끌시끌한 술자리에서도, 정치판에서도 도통 남의 말을 잘 들으려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어주는 것은 그 자체가 존중이고 사랑이다. 상대의 말은 듣는 시늉도 않고 조금의 틈만 생기면 말을 자르고 비집고 들어와서 자신의 목청만 높인다. 사랑과 영혼의 귀를 열어 자신의 귀 바깥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피우기는 힘이 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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