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영화 <피에타>를 보고

우람별(논강) 2012. 9. 11. 22:41

영화감독 김기덕은 <피에타>란 작품으로 2012년 6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차지했다. 이미 그는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인정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해외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2004년 제54회 베를린 국제영하제 공식 경쟁부문 감독상 수상작 <사마리아>, 같은해 제 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공식 경쟁부문 감독상 수상작 <빈집>, 그리고 2011년 직접 각본, 연출, 촬영, 배우까지 모든 역할을 소화한 셀프 다큐멘터리 <아리랑>이  제64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세계 3대 국제영화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게다가 이번에 황금사자상까지 탔으니 우리나라 영화계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고, 기념비적인 역사가 멋지게 달성된 셈이다.

 

그러나 모 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김기덕 감독은 상영 공간의 부족으로 관객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철저하게 자본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작품성보다는 흥행을 위주로 한 상영이 중심이 되다 보니, 관객들의 선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특정 재벌이 대형극장을 독점하고 있어서 영화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영화인의 고뇌가 배어나오는 것 같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 영화계를 관장하고 있는 국가부서와 그에 딸린 기관들의 사려깊은 조치가 뒤따르길 기대하고, 영화 매니아들의 수준을 결코 얕잡아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기덕 감독은 베니스영화제 현지 수상식에서 우리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 '아리랑'이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수상소감을 대신했다고 한다. 특유의 생활한복(제주 갈옷 210만 원짜리, 윗옷 150만 원, 바지 60만 원이다. 혹자는 사치스럽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일년 내내 그것만 입는다고 하니 소박함의 극치라 해야 맞다.)과 머리스타일이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고도 했다.

 

여하튼 우리 모두가 축하할 일이다. 김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창동, 문재인, 손석희를 지명한 것도 인상적이다. 영화감독 이창동은 비록 흥행에는 실패할지 모르나 일관되게 예술성 짙은 같은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감독이란 점에서 영화계의 선배로서 존경하고 있는 것 같고, 대선 후보 문재인을 존경한다고 표현한 것은, 그에게서 또다른 정치적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문재인의 국민이 되어 대한민국에 살고 싶다'고 했고. '고름이 가득찬 이 시대를 가장 덜 아프게 치료하실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공개적인 지지표현을 했으니 말이다. 손석희 교수에 대해서는 그의 아나운서 시절의 지조있는 언행에 호감을 가졌을 것이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제목 '피에타'가 주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예수의 주검을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의 슬픔을 형상화한 성 베드로 성당의 미켈란젤로 조각품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모자간의 뜨거운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듯해서 참 불편했다. 함께 본 아내도 눈을 감고 한동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자살을 하거나, 신체가 훼손당하는 끔찍한 장면, 실질적으로는 강렬하게 묘사된 끔찍함은 아니다. 관객의 상상력을 매섭게 자극할 뿐. 영화의 배경은 재개발 되기 이전의 청계천 주변, 허름하고 영세한 철공소들이 골목마다 들어선 곳이다. 감독 자신이 10대의 청춘을 보낸 노동의 현장인 만큼 설정 자체는 자연스럽다. 과거인 동시에 현재일 수도 있는 장면들이니까.

 

가난을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절함이 화면에 가득하다. 사채를 빌려 사업의 성공을 도모하지만, 이미 고통의 늪에 빠져버리고 만 그들이다. 그 이자를 갚고 또 갚고, 원금의 10배 이상에 해당하는 이자를 갚아도, 원금은 줄지 않아 희망이 없다. 결국 자포자기 상태의 채무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공포스런 협박이고, 상해보험금을 노리는 신체의 훼손이다. 사채업자들은 그렇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뜯어간다. 돈을 받지 못할 때는 인정사정 안 봐주는 철면피를 고용해서 죽지 않을 만큼의 상해를 입히는 잔인함을 보인다. '이강도'(이정진 분)는 사채업자에게 고용된 철면피 깡패이다. 비정하게 살아가는 인간백정, 그 역시 가난하지만 잔인함에는 동정심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온통 그의 폭력과 비정함이 차지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다. 돈 때문에 빚어지는 인간 사회의 추악함과 처절함, 분노, 복수가 판을 치는 세계의 연속이다.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한 가정의 단란함과 평화를 단숨에 깨뜨리는 무시무시한 폭력이 채무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자행된다. 지하경제에서 기승을 부리는 사채업자들의 비열함과 거기에 빌붙어 밥벌이하는 청부 폭력의 잔인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건물 밖 계단에서 한 채무자는 30년간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끝내 지탱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 자살을 결심한 듯 건물로 올라가고, 강도는 돈을 받지 못해 계단을 내려오는 대조적인 장면이 있다. 잠시 후, '쿵'하고 떨어지는 죽음의 소리. 강도에게 전해지는 죽음의 느낌은? 아무런 감정의 개입이 없다. 다만 언제부턴가 갑자기 찾아온 여인(조민수 분)에게서 가족의 사랑을 느꼈는지 강도는 사채업자한테 갖다 바치는 일을 잠시 소홀하게 된다. 인간성의 회복이 시도된다고나 할까? 그러나 사채업자에게 불려가서 배은망덕하다는 이유로 뺨을 수도 없이 맞고, 발로 밟히며 폭력을 당한다. 잘못했으니 용서하라고 비굴하게 비는 강도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돈을 받아 오랬지 누가 병신 만들라고 했냐?' 쓰러져 있는 강도의 뒤에 대고 지껄이는 사채업자의 말이 뻔뻔스럽다. 돈이 없으니 빌릴 수밖에 없고 또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보험금을 노리고 신체를 훼손당하는 비참함을 조장하는 장본인들이 바로 자신들이면서 어찌 그리도 비정할까? 눈도 꿈쩍 안하고 온갖 악행과 비리를 저지르는 놈들, 교언영색하는 정치인들을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비정함의 극치는 강도를 통하여 집중되지만, 몸을 교묘하게 숨기고 뒷전에서 조종하는 사악한 무리들이야말로 그 비정함의 주범들이 아닐까?

 

강도 앞에 갑자기 나타난 여자, 손에 잡고가다 놓친 닭을 대신 잡아 건네주던 여자, 피붙이 하나 없이 외롭게 자라온 강도에게 어느 날 엄마라면서 불쑥 찾아온 여자(조민수 분), 강도의 좁은방에 아예 정착할 작정으로 들어와 앉은 여자. 강도에게 뺨도 맞고 욕설을 들으면서도, 30년 전 아들을 버린 자신을 용서하라면서 오히려 무릎꿇는 여자, 공포로 떠는 채무자를 강도가 공사장 건물로 데리고 올라가 떨어뜨려 죽지 않을 만큼 상해를 입히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고, 떨어져 고통을 호소하며 버둥거리는 채무자의 다리를 돌 위에 올려놓고 힘껏 발로 밟아버려 결국 골절을 시키고마는 강도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하며 다리뼈를 부숴버리는 여자, 두 남녀의 잔인함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강도에 대한 여자의 애정을 보여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도 못믿겠던지 엄마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이강도의 위협은 가히 엽기적이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칼로 잘라 핏덩어리 살점을 여자의 입에 넣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자는 구역질을 참으면서도 행동에 옮기는 비범함을 보인다. 강도는 심지어 여자의 몸을 범하기도 한다. 내가 당신에게서 태어났으니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겠다면서 말이다. 이때 '여자'의 눈물범벅 연기가 압권이다. 결국 여자는 일련의 말과 행동으로 진심을 보여주는 데 성공을 한다. 아무리 인간백정이라고 하지만, 태어나 처음 자신을 찾아와 진심어린 애정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무섭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강도를 위해 장어를 한 마리 사다 주고 가는 여자, 장어의 목에는 하얀 종이에 여자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강도는 수조 안에 물을 넣어 장어를 살린다. 조명시설까지 만들어 놓아서 불꺼진 방에 수조의 조명이 은은하다. 장어의 목에 걸린 엄마의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거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당신이 내 엄마 맞아?' 여자는 대답 대신 동요를 부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하략)' 노래를 다 끝내기도 전, 강도는 방문을 열어 집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바로 옆에서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 강도에게는 감정의 변화가 일렁거린다. 어느 순간부터 호칭이 '엄마'로 바뀌고 그의 얼굴에 귀여운 미소마저 펴오른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무자비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았던 강도, 내면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 엄마를 만나 평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이같은 행동을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짠해지기도 한다. 어릴 적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언어 표현도 서툴지만 결국 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영화의 반전은 강도가 여자를 엄마라고 믿고 한 가족임을 실감하면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단계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여자는 강도에게 부탁을 하나 한다. 호수가에 나무를 하나 심어달라고.....(호수가에 나무를 함께 심는 장면 삽입) 그리고 내가 죽거든 그 나무 밑에 묻어달라고...... 그리고 강도의 생일날, 케이크를 하나 사오라고 하고...... 케이크에 32살 촛불을 켜고, 강도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들뜨지 않고 그냥 차분하다. 여자는 또 부탁을 한다. 심어놓은 소나무가 말랐을지 모르니 가서 물을 좀 주고 오라고..... 호숫가에서 물을 주고 있는 장면에서 강도의 휴대폰이 울리고 전화 속에서는 도와달라면서 여자의 공포에 찬 비명소리가 계속된다. 누군가에게 큰 변을 당하고 있는 장면이라 판단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가 아닌 위장이었다. 다소 혼란스럽다. 강도는 급히 집에 돌아와 확인해 보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 필시 누군가의 복수라고 판단, 강도 자신이 고통을 안겨준 채무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엄마가 복수를 당한 것이 아닌지를 확인한다. 엄마의 부재 상황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 때문에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 가족들의 일그러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되리라는 의도된 장치인데, 설정의 치밀함이 느껴진다. 동시에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안고 '피에타'('자비를 베푸소서'의 뜻)를 외쳤을 것만 같은 상황 같아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 피에타!!!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영화의 맨 처음 장면에서 강도의 위협에 결국 자살을 감행해야 했던 장애인 상구의 어머니였다. 아들 상구의 복수를 결심하고 강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 원수 앞에서 복수의 칼날을 계속 갈던 여인, 자살한 아들의 시신을 엎어진 냉장고에 넣어두고 복수를 감행했던 여인, 얼어있는 시신에 입힐 털옷을 짜기 위해 이강도의 집 안에서 눈물 섞인 뜨개질을 계속하면서 고통을 참아냈던 무서운 여인이었다. 가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똑같이 느끼게 해 주려고 자식을 죽인 원수 곁에서 엄마처럼 살다가...... 아들 죽은 곳으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고 처절하게 울면서 시신에 털옷을 덮어주는 여인이었다. 호숫가 소나무 아래 묻어두고, 비극의 원흉인 사채업자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여인이었다. 강도에 대한 복수의 마무리를 그렇게 끝내야 했던 여인이었다. '왜 이리 강도가 불쌍하냐, 왜 이리 마음이 아프냐' 절규하면서 몸을 던진 여인, 여자의 죽음을 지켜본 강도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주검 주변을 맴돈다.

 

강도는 유언대로 여자를 소나무 아래 묻기 위해 땅을 판다. 그런데 그곳에는 자살한 상구의 시신이 여자가 짰던 털옷과 함께 묻혀 있다. 죽음의 비밀이 드러나고..... 잊지 못할 최고의 장면 하나가 연출된다. 모자관계인 여자와 상구의 주검이 반듯이 누워있고, 여자가 짰던 털옷을 입고 여자 옆에 엄마 품을 그리워하는 아들의 형상으로, 옆으로 누워 여인에게 용서를 비는 듯한 무덤 속의 장면! 영화는 곧 결말로 이어진다. 새벽에 강도는 상구가 자살할 때 썼던 쇠줄달린 갈고리를 들고 또 다른 피해자 부부의 비닐하우스로 찾아간다. 그리고는 자신이 능멸했던 여인의 트럭 밑에 들어가 온몸을 쇠갈고리로 묶어 차가 움직일 때마다 피를 쏟아내는 고통스런 자살을 선택한다. 새벽길에 장사를 떠나는 여인은 영문도 모르고 차를 몰고, 그 차 밑의 강도는 시신이 되어 끌리면서 끝없이 피를 흘린다. 차의 조용한 움직임을 따라 낭자하게 뿌려지는 피, 새벽 도로에 오래도록 앙금으로 남아 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피에타!

 

가슴이 아프다. 마음이 불편하다. 어쩌면 그리도 물질에 좌우되어 살아야만 하는가. 그놈의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초라한 삶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란 말인가. 다시 한번 묻는다. 돈이 무어냐. 명예, 사랑, 종교, 정치, 조국, 우주는? 계속 갸우뚱거리며 고민할 수밖에 없다면 명쾌하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철학자라도 찾아가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상처받아 생긴 마음의 고름을 말끔히 없애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를 찾아가 내 몸을 맡겨야 되지 않을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빛나는 영화 '피에타'가 준 신선한 충격과 개성미 넘치는 감독의 여운있는 말과 노래를 가슴에 담으면서 또 하나의 위안을 찾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