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생가, 궁남지, 정림사지, 부소산성, 낙화암
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신동엽 시인의 생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직 개관을 하지 않은 신동엽 문학관에서 본, 파란 지붕의 신동엽 생가!
문학관과 생가를 담장 없이 출입할 수 있도록 관광객들을 배려한 것 같다.
'생가'란 시를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서각을 해 놓았고, 방문 바로 위에 걸어 놓았다.
누가 떼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감시용 CCTV가 있기는 해도..... 글씨가 귀한 것이라.....
최근에 신동엽 분학관이 새로 생겼으나 아직 개관이 되지 않고 있다.
경영상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얘기가 얼핏 들리긴 하던데......
비 내리는 '궁남지'에는 수많은 종류의 연꽃들이 한창이었다. 홍련, 백련, 수련, 가시연, 어리연, 향련 등
무안의 '백련지'와는 다르게 접근성이 좋아 연꽃을 직접 만져보고 쉽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길옆의 원추리꽃도 연꽃에 뒤질세라 관광객의 관심을 끄느라 그 자태를 자랑하기에 바쁜 듯하다.
백제 무왕(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궁남지', 부소산성 백제왕궁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궁남지'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못 가운데 '포룡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는 방식의
조경으로 못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으로서 주변에는 연을 심어 한여름이면
연꽃이 만개하는 고풍스런 정원이라고 볼 수 있다. 정박한 황포돛배도 오른쪽에 보인다.
가시연이 영역 다툼을 하는 것 같다. 개체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관리가 절실하다.
비바람에 꽃의 모양이 흐트러져 있어서 안타깝긴 해도 빗물을 머금은 연분홍 꽃잎과
연밥 주변의 노란 수술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준다. 자연의 빛깔이다.
아침 식사로 가볍게 열무국수를 하나 시켜 먹었는데, 입에 딱 맞아 행복했다.
나이 많은 부부가 사이좋게 천막을 쳐놓고 장사를 하는데 매우 친절하셨다.
2006년에 세웠다는 정림사지 박물관, 백제 사비 시기 불교와 그 중심에 있었던 정림사를 주제로
백제 불교문화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시키고자 건립되었다고 한다.
백제 불교의 중심이었던 정림사를 1/12로 축소하여 복원하였으며 정림사지 발굴 모습과
발굴 당시부터 현재까지 정림사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시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도록 했다.
국보 제 9호, 정림사지 5층석탑, 높이 8.3미터의 탑으로 일명, '소정방탑'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세부 구성 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이 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파괴되지 않고 옛모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것도 그 특징이라 하겠다.
보물 제 108호, 부여 정림사지 석불좌상.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 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있는 조감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정림사(定林寺)'는 이 절의 고려시대 이름,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 명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의 모습이다. 삼천궁녀가 백제 멸망을 앞두고
여기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데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자왕이 그렇게 많은 궁녀들을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었나?^^
시인 신동엽(1930~1969)의 묘는 능산리 고분군 맞은 편 야산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포장된 지방도에서 500미터 가량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무덤까지 가려면 우사도 지나고 계사도 지나 야산을 200 미터 가량 올라야 한다.
질척한 산길을 조금 오르면 자그만 묘가 하나 나타난다. 그의 무덤은 원래 파주시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있었으나 1993년 10월 20일,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위쪽에 위치한 무덤은 시인의 아버지 신연순(申淵淳)과 어머니 김영희(金英姬)의 합장 무덤이다.
시인은 장편 서사시 <금강>을 비롯하여 분단현실 극복에 역점을 둔 수많은 창작을 통하여
한국현대문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신동엽 시인의 무덤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능산리 고분군(백제왕릉원)이 위치해 있다.
위의 사진 부분은 국보 제 287호 백제 금동향로가 발견된 지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되어 있고,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