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소식지 투고용)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합리적 따스함보다는 불합리, 비합리의 냉랭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앞으로 세상이 좋아질 것 같다는 기대를 하면서 살아야 살맛나는 법인데 갈수록 숨이 막히고, 가슴 터질 일이 자꾸 벌어지고 있으니 앞으로 어찌 살면 될까? 개인적 차원에서 겪는 고통이라면 내 한 몸 힘들면 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 혼자만의 고통은 아닌 것 같다.
세상일을 잠시 잊고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을 때는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전국의 산하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새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돌이켜보면 꽤 오랜 세월을 그런 방식으로 대응해 왔던 것 같다. 지난 2학기 초부터는 목조건축 일에 모든 시간을 쏟아붓고 있는 중이다. 모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의 목조주택학교의 수강생이 되어 매주 목요일 저녁은 이론 공부하고, 매주 일요일은 시골에 가서 하루종일 집짓기 실습을 하면서 지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푹 빠져 사는지도 모르겠다. 또 스스로 선택해서 시작한 일이라서 참 재미있다. 여섯 평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지만 노익장을 과시하는 아버지께서 평소 꿈꾸시던 전원생활을 그곳에서 하실 수 있게 되었으니 저절로 코가 벌름거려지고 못생긴 내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펴오른다.
어떤 삶, 어떤 일이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소중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1982년 초임 발령을 받아 30년간을 국어교사로 살다가 어떤 전환기를 맞아 과목을 바꿨고, 작년부터는 진로진학상담교사로 모 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지는 늦깎이 상담교사로서 또 다른 행복감에 젖어 살고 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교사로서의 자기효능감이 훨씬 커졌다고나 할까. 입시과목으로서의 국어를 가르칠 때보다 오히려 더 행복하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의 고민이 어느 정도는 풀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 희열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전교조를 미워하는 현 정부의 출범 이후, 전교조 교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를 되짚게 된다. 뜬금없이 노동부의 한 관료가 전교조 사무실로 찾아와 전교조의 규약을 한 달 내에 시정하지 않으면 노조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한 사건 이후, 온 세상이 요동을 쳤고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정부로부터 갑자기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낭패감에 전율해야 했다. 탄압을 받을수록 더욱 강고해지는 전교조 교사들의 속성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섭섭함마저 생겼다. 언제나 그랬듯이 권력이나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지시나 요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야 하는 것을 신조로 살아왔고, 언제나 불의에 맞선 정의의 편에 서야 옳다는 것을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몇몇 분들의 시대착오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조치와 말씀에 대해서는 심각한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더욱더 단단히 뭉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비장함이 내 주변에 가득하다.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세상에 득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들은 세상과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 같다. 교육현장을 꿋꿋하게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고, 소신껏 가르치고 배우려는 분들이 바로 전교조 교사들이라고 판단되는데, 왜 그들은 미운털로밖에 보지 않을까?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겠다’고 말한 어부처럼 살지 않고 '모든 세상이 다 흐려도 나 혼자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어도 나 혼자 깨어있었다'면서 추방당한 이유를 말한 굴원처럼 남아있기를 좋아하는 성정 때문일까? 내 동료 중의 한 분은 격주 월요일마다 발행되는 ‘교육희망’이라는 전교조신문을 선생님들께 배달해 주는 기쁨으로 산다고 말한다. 어떻게 아이들을 만나고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참 순수한 동료들이다. 그 순수를 잃어버리는 순간 교육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하기에 오늘도 나는 행복하다. 더 이상 그런 분들에게 이념의 굴레를 씌워서 '종북'이니 '좌편향'이니 하는 소름끼치는 말을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상의 삶에 충실하면서 순수와 정의를 지향하는 교육자들임을 나는 확신한다. 지난 10월 하순, 답답한 마음에 우리학교 전 선생님들께 띄웠던 호소문을 이곳에 옮겨 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교조 분회장으로서 한 말씀 올리게 되었습니다. 합법노조로서의 지위를 14년간 견지해왔던 전교조가 급기야 그 법적 지위를 잃고 법 밖으로 밀려나는 노조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어제, 노동부와 교육부는 전교조가 교원노조법상의 규약을 시정하라고 통보를 받은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시행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노조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예정된 통보를 했고, 전교조도 노동부를 상대로 '법외노조 효력 정지 신청'을 내면서 앞으로는 법정공방이 아주 치열해질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언젠가 전교조를 '한 마리 해충'에 비유했고, 그 때부터 현 정부가 들어서면 참으로 어려움이 많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비상식적으로 압박하면서 몰아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전교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출범부터 지금까지 25년간 전교조와 뜻을 함께해 오면서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이라는 참교육의 기치와 그 순수를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탄압 국면때문에 참으로 허탈하고, 화나고, 기분 나쁘고, 세상이 싫기까지 합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긴급 개입, 국제교원연맹(EI)의 항의 서한 등 국제적 비난에도 국가권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는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뜯어말렸거늘 기어코 전교조를 벌레 잡듯 밟아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규약 시정명령 요구를 받았을 때, 일부 교사들은 일단 수용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 요구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외노조로 가는 파국만큼은 막자는 뜻이었지요. 그러나 조합원 총투표에서는 거부하자는 쪽이 훨씬 많았습니다. 전교조 조합원들의 전체적인 생각이 그랬고,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 되고 강력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선생님, 앞으로 전교조를 좀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합법적 지위를 갖고 있을 때는 그 존재만으로도 가입 조합원들의 협조만으로도 웬만한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강력한 압력단체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앞으로 전교조가 법적 지위를 잃고 법외노조가 된다면 모두는 비민주적 교육풍토 속에서 긴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1980년대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가 거대한 벽처럼 교육현장에 버티고 있던 상황에서 전교조가 앞장서 싸움으로써 많은 문제를 해결해냈던 그 공적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교조 출범을 전후해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교육민주화 바람, 과거의 역사이지만 그 정신은 면면이 이어져야 할 것이라 볼진대, 앞으로 우리가 부닥치게 될 비민주적 교육상황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맞서고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침묵은 금'이 아닌 것 같습니다.
1989년 천오백여 명의 전교조 교사들이 대량으로 해직되었을 때, 뜻있는 현장 동료들이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매달 만 원씩 후원금을 내기로 하고 월급날이 되면 그것을 일일이 걷으러 다녀야 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어요. 전교조가 출범한 지 24년, 앞으로 그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장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던 전교조였기에 앞으로도 선생님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직접 가입해서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늘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비록 법 밖으로 내밀리게 될지언정 절대로 기죽지 않고 묵묵히 지켜왔던 소신 굽히지 않고 전교조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많은 선생님들과 마음까지 함께하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슬픈 마음 추슬러 잠시나마 위안을 찾아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