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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솔뫼성지, 합덕성당, 신리 성지, 옥천 이지당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4. 8. 1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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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에서 1박을 하고 교황을 보았던 전날의 감격을 안고 다시 솔뫼성지를 찾았다.

 

솔뫼성지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 또는 구릉에 위치한 곳이어서 '솔뫼'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너른 예당평야 가운데 비교적 우뚝 솟아 있는 지형에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산 같은 곳이다.

 

 

발견되는 유물 등의 고증을 통해 김대건 신부님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전날의 기사 사진을 보니, 교황께서는 빨간 카페트 위를 걸어오셔서

두 사람이 서 있는 지점에 한참 동안 자리하여 기도를 했고 묵주 축성을 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하나 찰칵!

 

** 김대건 신부에 대한 기록을 인터넷에서 옮겨 본다.

 

**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일생 (1821-1846)

1. 초기 생애

 1) 가정 환경

  김대건(아명 김재복, 족보명 김지식, 안드레아)은 1821년 8월 21일에 충청도 솔뫼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경기도 용인 지방의 ’골배마실’에서 소년 생활을 보냈다. 서당과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익히고 열심한 부모, 특히 어머니 고 우르술라에게서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재주와 강한 의지력, 경건한 신심을 보여주어 1836년 6월에 사목 방문으로 지방 순회하던 모방 신부의 눈에 띄었다. 모방 신부는 15세의 소년을 며칠 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에 그에게서 사제 성소를 발견하고 그이 부친과 상의하여 예비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김대건은 7월 11일에 모방 신부를 따라 한양에 올라와 먼저 선발된 최양업과 최방제와 합류하여 라틴어와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모방 신부는 세 소년을 안전한 방법으로 효과 있게 교육시키기 위해서 마닐라나 싱가포르 또는 페낭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836년 12월 2일 김대건은 두 동료와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조선 교회 책임 신부들에 대한
순명을 선서하고 장상들의 허락 없이는 다른 지방으로 가거나 수도회에 입회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고, 일주일 후에 귀국하는 유방제 신부를 따라 국경을 넘어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지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가 있었다. 여기서 김대건과 동료들이 공부하였다. 그 동안에 마카오에서 내란이 일어나 그는 두 차례에 걸쳐(1838년 8월, 1839년 4월) 동료들과 마닐라로 피난 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김대건은 어학과 철학 과정을 끝내고 신학 공부에 들어갔다.

 

 2) 조선 입국 시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일어난 아편 전쟁(1840-1842) 중에 프랑스도 중국 이권 경쟁에 개입하기 위해 세실 제독의 ’에리곤호’와 빠쥬 제독의 ’파보리뜨호’를 극동에 파견하였다. 1841년 12월 8일에 마카오에 상륙한 세실 함장은 중국 이외에 조선 왕국과도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마카오 지부장인 리보아 신부에게 통역으로 조선인 신학생의 동승을 요청했다. 리보아 신부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조선 교회의 사정을 파악하고 선교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쾌히 승낙하였다. 1842년 2월 15일 김대건은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승선하여 2개월 후 양자강 어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남경조약의 체결(1842년 8월 29일)로 끝나자 프랑스 함대는 극동에서의 이권 추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조선 출동을 취소하였으므로 김대건은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하선하였다. 2개월 후에 최양업이 ’파보리또호’로 만주 교구의 부뤼기에르 신부와 함께 도착하였다.

  1842년 10월 20일 김대건 일행은 육로를 통하여 조선에 잠입하기로 결정하고 요동 지방의 백가점(百家店)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몽고 지방으로 떠나는 최양업과 헤어진 후에 매스뜨르 신부와 조선 잠입을 탐색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양인의 여행이 위험하기 때문에 혼자서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1842년 12월 23일 국경 지방으로 떠났다. 그는 도중에 북경으로 들어오는 조선 사절단 일행에 끼인 김 프란치스코라는 교우를 만나 기해대박해와 성직자 영입 운동의 소식을 듣고 먼저 자신이 입국하여 매스뜨르 신부의 영입을 준비하기로 결심하였다. 김대건은 조선 변문(의주)에서 조선으로 잡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한양으로 향하다가 부자연스런 언행으로 주민들의 의심을 받아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서는 1843년 1월 6일에 온갖 고생 끝에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3)입국

  1843년 4월에 김대건은 몽고 팔가자(八家子)로 옮겨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844년 2월에 페레올 고 주교(1843년 1월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음)의 명령으로 조선 동북부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우와 만나 주교의 입국을 논의하였으나, 안전하지 않아 압록강의 서북부 국경로를 이용하기로 합의하고 4월에 팔가자로 돌아왔다. 김대건은 1844년 12월 17일에 신학 공부를 끝내고 부제품을 받았다. 1845년 1월에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중국 국경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마중나온 교우들이 외국인 주교의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여 그는 혼자 들어가서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기로 결정하였다. 김 부제는 로사리오 기도를 되풀이하면서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맨발로 눈이 쌓인 길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5년 1월 15일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2.사목활동

  김대건 부제는 현석문(가롤로)이 마련한 집에 은신하면서 교회 사정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월에 그는 고생스러운 여행에서 오는 긴장이 풀려 병석에 누워 2주일 동안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김 부제는 리보아 신부에게 그의 귀국 사실과 함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의 순교 상황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에 천연두(마마)로 희생되는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해 약을 부탁하면서 치료법을 문의하는 등 동포애를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자기 귀국 사명인 성직자 영입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려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지리 지식을 제공하여 입국을 쉽게 하기 위해서 조선 지도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페레올 주교와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거주할 집을 충청도 해안 지방에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 석관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김대건은 배를 한 척 사서 상해로 여행할 교우를 선정하고 사공들을 구하였다.

  1845년 4월 30일에 김대건 부제는 사공 네 명을 포함한 11명의 교우들을 데리고 인천 제물포에서 중국 상해로 출범하였다. 이때에 그는 발각의 위험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자기 귀국 소식도 알리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불효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바다에서 3일 동안 폭풍우와 해적선의 위험을 극복하고 6월 4일에 무사히 상해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7월 28일에 페레올 주교에게 자기의 상해 도착을 알리면서 상해로 오시도록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다음 달에 주교는 다블뤼(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 도착했다.
  1845년 8월 17일에 김대건 부제는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서품을 받고 8월 24일에 만당(萬堂)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1주일 후에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상해를 떠나 제주도 연안에 표류하였다가 10월 12일에 충청도 지방의 황산포에 상륙하여 한양에 들어왔다.

 

3.옥중생활

  이곳에서 6월 5일에 체포됨으로써 병오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해주 감영에 끌려가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다시 한양의 포도청에 이송되어 40차례에 걸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재판관들과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의 외국어(중국어, 라틴어, 불어 등) 실력과 폭넓은 서양 지식에 놀랐고 어떤 대신들은 그에게 지리서 편술과 세계 지도(영국제)의 번역을 부탁하여 옥중에서 지도를 채색하여 한 장은 국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재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를 위한 구명운동을 벌여 그에 대한 판결이 3개월이나 연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46년 6월 세실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나타나 기해대박해 중에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사실에 항의, 문책하는 서신을 주민들을 통해 조정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와 김 신부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4.순교.
  김대건 신부는 친구인 최양업 신부와 페레올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는 마지막 효심을 보이고 교우들에게는 신앙 강화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1846년 9월 15일에 국사범으로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한강 새남터에 끌려 나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기도 하였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는 이렇게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참고: 가톨릭 대학교 한국 교회사 강의록)

 

 

 

 

냉담 중인 나 예로니모, 소성당 안에 들어가 성호를 긋고 잠시 묵상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방문이 우리나라 종교지도자, 정치인, 대통령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분명한데, 앞으로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엄청난 국가 재난인 세월호 침몰 사건을 겪었지만 그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져버리고 있는 정치인들의 뻔뻔함과 위선을 무엇으로 응징해야 할지 국민들은 고민해야 하리라.

 

성당 안의 기념관은 주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삶을 조명하도록 기획되었고

그의 짧은 삶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자신에게 돌아올 엄청난 박해가 예상되었지만,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의연하게

해야 할 일을 치밀하게 진행해 나갔고, 증조부부터 자신까지 4대에 걸친

순교의 고통,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했던 사실은 감동적인 한국 천주교의

소중한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순교했던 124명의 신도가 이번 교황 방문을 맞아

성인 다음가는 복자의 반열에 오르는 절차를 밟는다. 시복식을 교황께서 집전하는 것이다.

 

솔뫼성지 전시관 안에는 대전교구를 거쳐간 

故 신부님들의 유품과 행적을 전시해 놓은 공간도 있어서

숙연하게 한참을 머물다가 나왔다. 봉사하는 삶이 얼마나 가치있고

숭고한 삶인가를 한눈에 느낄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인상 좋은 어느 수녀님의 청소하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김대건 신부님의 영어 필기체 글씨는 명필이었다. 서명 부분의 kimhaikim....이 눈에 띄었다.

 

솔뫼성지에서 4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는 충남에서 제일 먼저 건축된 성당인 합덕성당이 있다.

1890년 양촌성당으로 설립됐으며, 1929년 신축됐다. 높이 솟은 좌우의 종탑이 퍽 인상적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잠시 앉아 있다가 인증샷 하나를 남겼다.

 

노란 모자는 교황의 방문 기념으로 제작된 햇볕가리개 모자이다.

 

합덕성당을 보고 마지막으로 5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리성지로 가 보기로 했다.

 

신리성지 입구, 날씨가 더운 탓에 건물 안에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징적인 것 하나만 찍어서 인증샷을 남겼다.

 

신리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첫걸음을 내디딘 후 1868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내포지방 천주교 유력자였던

손자신 토마스의 집에 은거하면서 황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사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였다.

 

또한 신리는 천주교 탄압기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우마을이었으며, 선교사들의 비밀입국처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의 천주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곳은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 불리고 있다.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발달된 삽교천 수계를 통해

중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히 연결될 수 있었던 점과

 내포지방의 문화적 개방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귀로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점심은 옥천의 맛집 <대박집>이란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생선국수와 생선국밥이 유명한 곳이다. 둘 중의 하나를 주문하면서

도리뱅뱅이 하나를 시켜서 먹으면 금상첨화다.

 

 

도리뱅뱅이 한 접시의 가격은 10,000원이다.

깻잎에 빙어 서너 마리를 얹어 고추와 마늘 썬 것을 얹어먹으면

그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해져서 여운이 제법 오래도록 남는다.

 

옥천 IC에서 내려 대전 방향으로 잠시만 달려가면 '이지당(二止堂)' 이란 이름의 서당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 이지당은 조헌 선생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학문을 논의하던 서당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은 광무 5년(1901)에 금,이,조,안 씨의 네 문중에서 정면 7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새로 지었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되찾고 금산 전투에 참여하여 700의병과 함께

목숨을 잃었던 의병장이다. 영의정의 벼슬을 받았고 시호는 문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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